어쩌다 한 번 허구한 날 반강제적 칩거 일상의 답답함을 누군가에게 호소하기가 무섭게, 그러게 왜 그런 선택을 했나는 힐난이 어김없이 쏟아진다. 거참, 오랜만에 하소연인데 너무하네. 한 성깔 하는 나는 되받아쳐주고픈 말이 턱밑까지 차오르지만, 꼴에 티끌만 한 양심이 가까스로 순간 괴력을 발휘한다. 철면피일지언정 뼈 때리는 지적 앞에선 비굴하게 꽁무니를 뺀다.
10대 중후반의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무지함은 죄라고 쳐도, 개중에는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일마저 왜 평생을 끌어안아야 하는지 영문을 몰랐다. 조카의 크레파스 18색과 같은 세상을 향해 농성 비스무리한 짓도 벌였건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 일 없다는 듯 무심한 세상에 허무해서, 아니 억울해서 더 이상 아픔을 견딜 수 없었다. 몇 년의 고민 끝에, 내게 벌어진 모든 최악의 상황은 결국 나 자신이 남들보다 모자라고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서둘러 결론지어버렸다. 그 뒤론 좀 전에서처럼 웬만해선 누군가에게 투정 부리지 않고자 결정에 앞서 신중했고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딴에는 말이다.
그토록 지독하게 방황했으니 서른 즈음엔 모든 게 좀 더 명확해질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삶의 방향성이라던가 혹은 지향점이라던가. 그러나 1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스스로가 내린 선택에 버거워하는, 하루하루 멍청하니 보내는 흐리멍텅하고 미숙한 어른이 되어 걸핏하면 울화가 치밀다가도, 이내 주체 못 할 분노를 표출한들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음을 깨닫고서 금세 허탈해진다. 매사 울화와 공허감의 사이가 내 현주소다.
'예전의 나'에서 '지금의 나'로 변화한 건지, 내면 한구석에 잠긴 '특정 모습'이 어떤 계기로 박차고 올라 현상의 비중을 대거 차지한 건지는 알 수 없다. 하기사 굳이 알아봤자 뭔 소용인가 싶다. 어쨌든 '변한 나'도, 울화와 공허에 휩싸여 어쩔 줄 몰라하는 흐리멍텅구리도 똑같이 나라는 사실은 마찬가지잖아.
사람은 자식을 기르면서 성숙해진다더니. 어느덧 사남매의 엄마가 됐건만 솔직히 전혀 모르겠다. 내 처지가 비교적 곤궁에 처하지 않아선지, 남들만큼 가정에 열과 성을 다하지 않아선지 뭐가 됐든 하릴없이 허송세월하고 있단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울화는 관심사를 가져 주의집중을 분산해보기라도 하지만 이 공허감은 어쩔 도리가 없다. 마음이 텅 - 텅- 흐리멍텅하다. 공허함은 해소할 방법이 있을까? 공허는 고독과 유사한 속성일까 아니면 상이한 정서일까, 비단 나뿐만 아닌 기성세대를 보면서도 느끼는 바지만 짐짓 삶 속에는 정답보단 의문이 더 상당할 것이다. 지금 이 공허감은 결국 그중 일부인 셈이다, 그것도 아주 작은 단위의.
이 모든 의문의 정답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겠지만 그에 준할 유사 답안은 기실 누구나 알만큼 뻔하다. 예의 나는 까닭 모를 아픔을 외면하고자 세상과 타협을 해왔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보다도 먼저 행해져야 할 단계는 바로 자기 자신과 타협임을. 그러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를 마주해야 함을.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자신을 마주한다는 건 크나큰 용기를 필요로 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의 최선'이라는 건 결국 자신을 바로 보지 않으면 내게 무엇이 주어졌는지 가늠조차 모호하다. 스스로에게, 타인이 나에게 향하는 기대치는 덮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말이다.
여전히 공허감을 해소할 법이나, 이에 대한 정의나 결국 아무것도 정해진 바가 없다. 그저 투쟁이든 암시든 자신과의 협상이 필요한 시점임을 인지할 뿐이다. 여전히 거울에 비친 표면상의 자신조차 바로보기 꺼려지지만, 언제까지고 마음을 텅 비운 채 놔두기에는 눈앞은 깜깜하고 주어진 무게는 너무나 버거우니. 당장의 최선으로서 순순히 내면에 귀 기울이기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사실은 나 지쳤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