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정욕구는 곧 공명의 위안.
나의 인정욕구는 결국 공명에 있다. 나를 보고 듣는 이들로 하여금 '나는 살아 있고 앞으로도 살아가겠다'는 희망을 은근한 울림으로 느끼게 하고 싶다. 직설이 아닌 간접적이고 은은한 울림으로 전하고 싶다. 내가 그렇게 위안을 받았듯이.
그만한 수단으로 무대라는 매개가 적합했으나, 이제는 내 어깨에 달린 부양의 의무가 막중해진 이상 영영 길을 잃고 말았으니. 나이 서른이 넘도록 이렇게나 갈피를 못 잡고 여즉 헤매는 중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