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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하 Feb 23. 2021

선긋기

그저 외줄 타기 곡예.

Photo by. Sean Benesh / Unsplash


    마침내 인정했다. 뻔한 결말, 예견된 수순이었다. 아니, 9년이면 생각보다 오래 버텼으니 뻔하지 않은 건가. 나는 아무렇지 않다. 동요조차 없다. 아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어쩌면 명분이 아니라 나를 붙잡아주길 기대했던 것도 같다. 한바탕 소요가 지도록 죽지 않고 살아남은 허무는 기실 실망에 가까웠으므로.


    그러나 사실을 돌이킬 수 있을까. 그건 아니었다. 사유는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이상 묻을 수 있지만 벌어진 사실은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언행은 사실에 속한다. 그러니 짧은 대화만으로 지난 9년 무색하도록 드러난 밑천이 바로 사실이었다. 서로가 버티기에 급급한 외줄 타기였다. 누구 하나 다가올라치면 넘실대어 균형 잡기도 버거. 끝 모를 심연으로 나가떨어질까 전전긍긍하던 내 모습은 우스꽝스러웠으려나.


    사랑을 받아봐야 사랑을 줄 줄도 아는 건데 나는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 눈 앞에 손해만 차곡차곡 쌓여 탑을 이뤘다. 공든 탑은 쉽게 무너지고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데 들일 공도 없이 시간을 타고 저절로 서린 원망과 열등감은 깊숙이 뿌리 박혔다.


    모든  지쳤다, 부질없고. 어쩐지 그동안 모든  너무나 쉬웠다. 나는 그런 것과 전혀 거리가 멀었는데. 몰두하고 애쓰고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허락 감정이 아니었다.  그랬듯 남들보다 몇십 박자 느리게 깨달았다.


    허물어지는 마음을 이해라느니 위로라느니 따위를 바라진 않는다. 구원 요청도 터무니없다. 다만 자그맣게 기대한다. 차라리 온통 비우고 나면 다시 채울 수 있을까, 하고. 벌어진 사실은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을 먹는다, 이제 그만 넘실대는 외줄에서 내려오기로.


    흔들리긴 쉬어도 막상 움직이기 어려운 마음에, 수런거리는 속내를 무심히 포장한 그 위로 덧없는 일상을 한 꺼풀 덧씌운다. 슥, 외선을 긋는다. 또 흐지부지되겠지만 개의치 않고 긋는다. 참 별 거 아닌데 별 거다. 더 이상 일일이 상처 받고 싶지 않고 지척에 앞길은 구만 리인 까닭에 겨자씨만한 가능성으로라도 확실한 균형이 필요했다. 그것이 한낱 어리석고 서투른 몸부림일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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