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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 spiro spero

그냥 글이 써졌어

by 민창

숨 쉬는 한 희망은 있다.


1.

인천에서 서울까지, 서울에서 인천까지... 20살부터 27살의 지금까지 통학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인천에서도 서울과 가까운 인천이 아닌 인천 중 서쪽 끝을 살고 있는 참 인천인(?). 신도시들의 높은 빌딩보다 세월의 흔적이 있는 건물이 익숙하고 월미도 서해 바닷냄새가 익숙한 바다사람. 그런 곳에서 서울의 중심 중에 중심인 광화문쪽을 오고 가며 7년을 그렇게 살아보니 이제는 통학이 익숙하다.


30분은 옆동네, 1시간은 가까운 거리, 1시간 30분은 갈만 한 거리, 2시간은 조금 먼 거리. 빠른 전철을 타고 다니다 보니 횡단보도 빨간불에 멈추는 버스는 답답하다. 프로 통학러인 나에게 그래도 익숙하지 않은 것은 1교시를 출석하는 것... 집에서 동인천 역까지 30분 정도 걸리고 동인천역까지 서대문역까지 1시간 10분이 걸리며, 서대문역에서 학교까지 10분이 걸려 총 1시간 50분이 걸린다. 출근길이라는 전쟁통에서 통학을 하기 위해 1교시가 있는 요일은 6시에 일어나야 한다. 15주. 15번의 오전수업 출석을 해내야만 한다. 1교시 출석은 여전히 통학 인생의 최고 난도. 집에서 학교까지 꼬박 1시간 50분, 아침 6시 기상이 기본이다. 하지만 통계상, 한 학기엔 꼭 2번은 실패한다.... 오늘이 그 중 하루였다....



알람소리가 아닌 엄마의 목소리로 일어난 오늘. 아들~ 학교가?

피곤하지 않고 개운하게 일어난 오늘.

창문 틈 사이에 들어오는 햇빛을 맞으며 일어난 오늘.

아,,, 한 시간을 더 잤구나...


벌떡 일어나 카카오 T 어플을 켜 택시를 부른다. 바로 잡힌 5분, 양치 세수 2분, 옷 갈아입기 2분, 아파트 단지 나가기 1분 충분하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초능력을 발휘한다. 무엇이든 해낸다. 오늘도 해내서 5분 안에 준비하고 아파트 단지에 나가 택시를 탄다. 택시에서 지하철 어플을 확인한다. 다행히 급행이 있지만, 서대문 역까지 9시 5분에 도착하는 걸로 나온다. 수업은 9시에 시작, 아무리 노력해 봐도 서대문역에 도착하는 시간은 9시 5분. 도착하자마자 뛰어도 서대문 역에서 학교까지 5분은 걸리니 나는 최소 10분은 지각이다... 통학을 하면서 항상 서운한 부분은 이럴 때다. 수업을 시작하기 1시간 20분 전에 나왔는데, 이미 내가 지각이라는 것을 알고 가야 한다는 것.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미 지각했다는 것. 아 오늘은 진짜 학교 가기 싫다... 최후의 방법을 쓴다. 전철 안에서 교수님께 정성이 담긴 마음의 편지를 쓴다. 최대한 자상하게, 부드럽게, 착하게 그러면서도 억울한 마음과 섭섭한 마음을 담아 글을 쓴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수요일 교수님의 오전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입니다. 추운 날씨가 풀려 아침을 시작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느낌인데, 학생들을 위해 일찍 와주시는 교수님 참 감사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평일 사역을 하고 있는.... 블라블라"


10분 조금 더 일찍 일어날 걸, 조금 더 빨리 잘 걸 후회하는 마음을 둘러보고 있을 때 교수님께 문자가 왔다.


"아침에 일어나 먼 길 오는 게 참 어렵죠? 10분 더 출석 어플을 열어놓을게요. 조심히 오세요."


오전 수업의 지각을 스포 당하고 좁아진 마음의 나는 교수님의 자상하고 감사한 배려가 미션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10분 연장 뛰어보도록." 정신없이 신은 신발이 운동화여서 다행이다. 참 밉게 9시 5분 정확하게 서대문에 도착한다. 신나는 5분짜리 노래를 튼다. 이 노래가 두 번 끝나기 전까지 도착하면 된다.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가방이 무겁다는 이유, 피곤하다는 이유, 다리가 아프다는 이유 그 어떠한 이유도 내가 뛸 수 없는 이유가 되어줄 순 없다. 도착한 학교 정문. 학교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강의실에서 듣는 수업이라는 게 오늘따라 참 감사하다. 그렇게 도착해 강의실로 들어간다.

"뛰었구먼 고생했어"

"헤엑... 하아.. 헤엑... 예... 교수님 감사합니다."


다음주는 좀 더 여유롭게 일어나자... 그래도 오늘은 어쨌든, 해냈다.

지각을 스포당한 오늘도, 희망이 있었다...




2.

이파리를 잃어버린 겨울나무는 뿌리 끝이 얼어붙어도 숨을 쉬고 있었다. 내 삶의 겨울은 참 추웠고 생명을 피우지 못하는 존재들에게 사죄하는 슬픈 밤의 연속이었다. 살아 있는 증거가 아닌, 견뎌야 할 하루의 입장권처럼 느껴졌던 지난날의 내 시간들. '희망'이라는 단어는 유리병에 갇힌 반짝임처럼 보였고, 나는 그걸 단 한 번도 내 손에 가져보지 못한 사람 같았다. 바람도, 빛도, 위로도 없는 방 안에서 숨조차 낭비하지 말자. 희망은 없었지만, 숨은 있었다.


커다란 꿈과 모두가 바라는 다짐도 아닌 마치 문장 끝에 찍힌 쉼표를 닮은 숨. 나에게는 숨이 남아있구나. 내 삶은 '끝'의 고정이 아닌 '이어짐'의 과정을 보내고 있구나. 삶의 겨울을 보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원하는 희망은 어쩌면, 불빛이 아니라 그림자의 방향을 아주 살짝 바꿔주는 작은 각도기를 닮아 있지 않을까. 무언가를 밝히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어둠이 출구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은 화살표.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자연의 순리처럼 가끔씩 다시 찾아오는 겨울의 계절에는 매일같이 쉼표를 살아간다. 다시 숨이 버거워질 때면, 작은 화살표 하나가 나를 여백으로 이끌어 준다. 끝이 아닌 여백과 이어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닫힘이 아니라 이어짐. 그리고 그 가운데 숨 쉬고 있는 계절 속 나무.




3.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라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할 거 같아. 사랑은 꼭 곁에 있어야만 가능한 건 아니야. 무엇을 주고받지 않아도, 같이 미래를 꿈꾸지 않아도 그 사람이 나와 마음이 시선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것. 사랑이라는 단어에 부수적으로 붙는 많은 조건들을 이겨낼 수 있는 것. 같이 있어야 하고, 노력해야 하고, 표현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내 옆에 숨 쉬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용기를 주는 것. 이것이 사랑이지 않을까.


4.

엄마, 아빠.

내가 두 분에게 받은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을 꼽는다면, 아마도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요. 최근에 세계사 책을 읽었어요. 그 책에는 독일이 통일될 수 있었던 이유가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서독이 동독의 사랑을 샀기 때문이라고요. 1975년부터 통일 직전까지, 서독은 매년 동독에 평균 23억 달러,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66조 원을 아무 조건 없이 지원했다고 해요. 서독은 단 한 번도 동독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 꾸준한 베풂이야말로 통일을 가능하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고요. 물론, 이 이야기는 돈이 전부라는 뜻은 아니에요. 사랑이란 결국 조건을 내걸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것,그게 이 사례가 말해주는 본질이 아닐까요.


우리는 인간이에요. 무한하지 않은 존재죠. 그래서 사랑도 언제든 고갈될 수 있어요. 사랑을 베풀기 위해선, 어디선가 사랑을 채워야 해요. 그게 사람일 수도 있고, 신념이나 꿈일 수도 있겠죠. 어떤 방식이든, 자신을 어떻게 채우고 있는지 아는 것, 그건 참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숨을 쉬고 있기에 우리는 내일을 꿈꿀 수 있듯, 사랑을 채우고 있기에 누군가에게 아무 조건 없이 마음을 내어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조건 없는 사랑을 흘릴 수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나를 채워주는 존재를 인생에서 만난다면, 그건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것 같아요. 그런 존재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며, 각자의 걸음을 맞춰 함께 걷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 하루하루가 바로 희망을 꿈꾸는 시간이 되겠죠.





우리의 언어에는 삶의 온도가 묻어 있어.

그래서 더 오래, 더 천천히 머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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