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

이두의

by 도서관 옆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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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손녀, 에스더에게.

에스더야. 잘 지냈니?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출발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갭이어로 한국에 떠난다니, 감회가 새롭다.

어린 손녀가 벌써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는 것에 놀랐고,

네가 택한 국가가 할머니가 태어난 한국이란 점에 감동을 했다.

혼자 먼 땅으로 떠나는 너에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좋은 조언을 많이 해주었을거라 믿는다.

이 늙은 할미가 굳이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그저 건강하게 다녀왔으면 좋겠구나.

하나 부탁하자면 그곳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을 기억해주렴.

그리고 돌아와서 나에게도 너의 느낌을 전달해주렴.

그렇게 해준다면 정말로 고마울 것 같다.

에스더야. 나는 네가 그곳에서 굳이 무언가를 이루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하루를 무엇으로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젊은 날에 나는 낯선 땅에 홀로 서있는 느낌을 많이 받았단다.

내 부모님은 좋으신 분이었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을 채워주실 순 없었지.

학교에 나가 나와 피부색이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면 외로움은 당연한 거였어.

난 그 괴로움을 잊기 우해 비어있는 오늘에 노력을, 내일에 꿈을 담았다.

젊은 시절의 나에게 하루는 다음 하루로 넘어가기 위한 동력이었다. 세상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보물들로 가득찼고, 하루라는 그물을 사용해 그것들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과정은 성취감과 기쁨으로 충만했지. 그렇게 나는 하루를 오롯이 나의 것으로 만들었고 외로움을 잊었어.

허나 에스더야.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나는 한 남자를 만났단다.

그 남자는 무언가 특별한 점도 없고, 우리가 특별한 일을 한 것도 아니지만,

그냥 이유없이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었단다.

나는 하루가 한사람으로 가득 찰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단다.

그때 하루는 그물이 아닌 석류가 되었어.

향기는 못 견디게 차고 넘쳤고, 알알이 영근 속내는 빨갛게 들끓었지.

아침을 그 사람의 생각으로 일어나서, 저녁을 그 사람의 생각으로 잠들었단다.

놀라운 일이야. 내 하루는 오롯이 나의 것인 줄 알았는데,

내 하루가 어느새 그 사람의 것으로 되어있었단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냐고?

난 하루를 비우기 시작했단다.

충만한 내 하루에 그 사람이 비집고 들어올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더 이상 계획을 하지 않고, 준비를 하지 않고, 그렇게 그 남자를 받아들였단다.

그 덕분에 네 아빠가 태어났고, 네가 태어날 수 있게되었지.

에스더야.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단다.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어.

내 인생에 가장 놀라운 시기가 그렇게 우연히 찾아왔다는 걸 말이야.

하지만 그게 인생의 비밀이란다. 인생에서 정말 멋진 순간은 우연히 찾아온단다.

난 네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걸 안단다.

그러니 조금은 쉬라고 말해주고 싶구나. 갭이어잖니?

계획과 준비는 조금하고 네가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받을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

계획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가 알지 못하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거란다.

그건 할머니처럼 운명의 상대일지도,

혹은 네가 알지 못했던 너의 새로운 모습일지도,

영원히 너를 믿어줄 우정과의 만남일지도,

앞으로 너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줄 새로운 기회일지도 모르지.

그러니 에스더야. 하루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너는 그 질문에 이미 많은 대답을 알고 있단다.

네가 모르는 대답을 얻기 위해서 먼저 하루를 비워두렴.

그리고 갭이어를 통해 새로운 대답을 많이 얻어오길 바란다.

사랑하는 할머니, 김 플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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