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
1.
그대는 날 어떻게 기억하나요?
2.
그 사람을 떠올리면 검정색 폴로 카라티가 생각난다. 하얀 말이 왼쪽 가슴팍에 박혀 있는, 그래서 그 남자가 숨이라도 거칠게 쉴 때면 마치 검은 들판을 뛰노는 것처럼 보이곤 했다. 날 만날 때마다 자주, 아니 거의 매번 그 옷을 입고 나왔다. 같은 옷을 3번째 입고 나왔던, 우리의 3번째 만남에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옷인지 그에게 물었었다.
- 그런가요? 자주 입는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선희씨 만날 때마다 이걸 입었었나요? 그냥 제가 옷을 고를 줄 몰라서 같은 옷을 많이 사서 그런가봐요.
자신은 미처 몰랐다는 그의 대답은, 그답게 싱거웠다. 만나도 별 말이 없던 그 사람. 기쁨과 슬픔의 양 끝이 참 좁게 보이던 그 사람. 그래도, 그래서, 무던함이 좋았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요동치지 않을 사람이니까. 그렇게 그는 내게 무채색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되었다.
3.
기억은 낡은 내복처럼 색깔이 날아가고 형태마저 희미해졌다. 바람 부는 뒷골목을 걷고 새벽 찬 물에 쌀 씻으면서도 잊지 않던 사람인데, 어느새 기워도 기워도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게 되었다. 무채색으로 떠오르던 그 남자는 이제 색깔 밖에 남은 것이 없다. 거울 안 눈동자 속에, 피아노 건반과 건반 사이에, 핸드폰 케이스에서 문득 나타나선 아무 말 없이 사라지곤 한다. 그, 답다.
4.
- 커피가 별로인가요?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요.
동생의 소개로 나온 자리라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동생은 아직 어린 남자 애들답게 사람 볼 줄을 몰랐다. 내 앞에 앉아 고개 숙여 날 바라보는 남자는 낙엽 같이 가벼운 달콤한 향을 은은하게 풍기는 남자다. 자신의 눈동자가 어디서 볼 때 가장 매력적인지 아는 공작새 같은 남자다.
- 아니요. 마음에 들어요. 근데, 좀.
커피와 함께 대답을 삼키고 잔을 쳐다봤다. 커피의 쓴 맛을 좋아해서 보통은 에스프레소를 시킨다. 하지만 금방 말이 없어질 것 같은 자리인지라 양이 많은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할 일이 없는 입에게 소일거리라도 주려고. 헌데, 맛이 너무... 손목을 살짝 돌려 잔을 흔들었다. 출렁거리는 표면을 보고 있으니 입을 데지 않아도 질감이 느껴지는 듯 했다.
5.
- 조금, 싱겁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