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
현주 아파트.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10년 정도 건축이 중단되었다가 최근 하전그룹에 합병되면서 회생된 아파트다. 외관이야 새로 도색을 하며 나름 신식으로 꾸몄지만 구조 자체는 20년도 전에 설계가 되었기 때문에 다소 촌스러운 점이 있다. 그래서 주변에 다른 아파트들보다 싼 값에 나왔고 덕분에 3달 전, 106동 1502호에 입주할 수 있었다.
애 둘을 키우기에 전에 살던 아파트는 너무 좁았다. 둘째는 예상에 없던 터라 현주 아파트는 출산 후부터 급하게 집을 알아보던 나에게 참 반가운 매물이었다. 역에서 거리가 조금 있지만 어차피 출퇴근은 자가용으로 하는데다 나름 상권도 조성이 되고 있는터러 크게 불편함 점도 없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바로 근처에 괜찮은 맥주집이 없다는 점. 호프집이 몇 개 있긴 하지만 다들 치킨에 맥주를 곁들였을 뿐이지, 정말 맥주만 고집해서 파는 집이 없다. 전통 흑맥주를 파는 가게가 있다면 좋을텐데. 아쉬운 대로 주말이면 근처 마트에서 맥주를 사와서 혼자 마시곤 한다. 요즘 같이 후덥지근한 6월이면 베란다에서 얼음 띄어 마시는 맥주가 나쁘지 않다.
부인의 눈치가 보여 뒷베란다로 나가 있으면 103동이 보인다. 106동과 103동이 나란히 서있는 꼴이라 훤히 103동을 마주하고 있다. 7시가 좀 넘으면 불이 꺼져 있는 집보다 켜져 있는 집이 더 많다. 저것도 야경이라며 달래기엔 너무 운치 없다. 사각 와플 틀로 찍어낸 듯한 광경이다. 얼핏보면 얼음틀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원고지 같기도 하다. 칸과 칸 사이에 이야기를 품고 있는 원고처럼 저 아파트도 칸과 칸 사이에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이 있을 거다. 사는 것이 그렇다며 윗집에 한숨을 아랫집이 받고 아랫집의 지청구를 윗집에서 토닥거리며 살테다. 그러니 저들의 모습을 글로 찍어내면 소설이고 수필이고 문학이 될 테다.
술은 생각마저 안주로 삼는 터라 생각을 씹다보니 오만가지 감상이 터져나온다. 때마침 떨어진 술을 핑계로 자리를 일어선다. 불 켜진 창과 불 꺼진 창이 섞여 있는 103동이 보인다. 창마다 소설이고 시다. 운치는 없는 풍경인데 이야기가 가득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