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스텔로 Mar 23. 2023

<헌트>와 <수리남>에 부재한 근원적 불안


<헌트>와 <수리남>에 부재한 근원적 불안


<헌트>
<수리남>


언젠가 김지운 감독은 본인이 무척 좋아하는 장면으로 <택시 드라이버>에서 트래비스가 어린 창녀인 아이리스를 구하기 위해 권총을 들고 사창가에 가는 장면을 뽑은 적 있다. 김지운 감독이 놀라워했던 것은 트래비스가 곧바로 사창가 건물에 들어가지 않고 그 앞 계단에 얼마간 앉아 있다가 건물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 찰나의 순간은 트래비스의 영웅심 뒤에 가려진 그의 근본적인 불안과 고독감을 그 어떤 장면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더욱이 그 찰나의 행동은 장면에 묘한 리듬을 불어넣는다. 예상하지 못한 정지와 침묵이 촉발하는 이상한 긴장감. 나는 언제나 한국 영화에 그러한 순간들이 부재하거나 부족하다고 느껴왔다.


<헌트>와 <수리남>은 속고 속이는 관계, 말하자면 믿음과 불신의 관계를 핵심으로 삼으면서 치열한 액션으로 무장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또한 두 영화의 주인공이 비록 신분상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정체를 들키면 목숨이 날아가는 극한의 위험에 장기간 노출되어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다만 두 영화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방식은 다소 다른데, 기본적으로 <헌트>는 <수리남>에 비해 액션에 훨씬 더 치중한다. <헌트>는 마치 알람을 맞춰놓은 듯 특정 시간이 지나면 액션을 기계적으로 서사에 틈입시킨다. 액션의 역동성 때문에 순간적으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긴 하지만 그로 인해 서사는 분산되고 이음새는 약해진다. 또한 인물의 심리와 상황을 정리할 충분한 여유를 가질 수 없게 되면서 이야기는 점차 피상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내부의 스파이를 색출해가며 의심과 믿음의 메커니즘을 다루는 영화로서는 치명적인 결함이 아닐 수 없다.


<수리남>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하며 끝없이 믿음의 선을 희미하게 만드는 데 집중한다. 민간인 신분으로 국정원의 비밀 임무에 동참한 강인구는 전요한 목사와 국정원 요원 최창호 사이에서 어디 편에 서야 할지 갈등하고, 전요한 목사 진영 내부의 배신자가 누구인지, 전요한 목사 진영에 침투한 언더커버가 누구인지 끝없이 혼란을 겪는다. 이러한 혼란은 전요환 목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데, 그는 마약 밀매를 하려다 브라질 국경수비대에게 들키고, 미국 자치령인 푸에르토리코로 마약을 운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등 강인구를 포함한 내부 배신자를 색출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영화는 강인구와 전요한이 다른 인물로 의심의 방향을 돌리는 순간을 계속 만들어내기 위해 이 일련의 상황들을 지나치게 많이 조성한다. 그런 탓에 후반부는 <헌트>의 경우처럼 피상적으로 느껴진다.


<헌트>에서 박평호와 김정도, <수리남>에서 강인구는 목숨이 오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연이어 겪는 고독하고 위태로운 인물들이다. 또한 이들은 전요한 목사와 달리 현실적인 인물들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과 존재론적 고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이 전면화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작품 전반에 그 체취가 조금은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 영웅주의에 빠져 있는 뒤틀린 욕망의 소유자 트래비스가 결정적 순간에 잠시 계단에 앉아 초조해 하던 것처럼 말이다. 결과적으로 두 영화는 각각 액션과 의심의 미스터리라는 두 항목에 기계적으로 열중하는 바람에 인물의 근원적 불안을 포착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꽤 잘 만든 이야기임에도 <헌트>와 <수리남>이 무언가 부족하고 아쉽게 느껴지는 건 그러한 연유 때문일 것이다.






[2022년 9월] 불면의 고통 속에서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매거진의 이전글 <보스턴 교살자>, 범죄 수사 영화의 불후의 걸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