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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Oct 05. 2023

치유의 글쓰기


치유의 글쓰기



“글은 그럴듯하게 쓰는데 상업적이지가 않아.”


내가 시나리오와 단편 소설을 쓰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대체 상업적이라는 건 무엇일까.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장르문학과 순문학 사이의 간극은 무엇일까.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저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를 참고하면 대만 영화계의 거장 차이밍량은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면 상업영화이고, 나의 내일을 걱정하면 예술영화입니다. 그러므로 상업영화는 항상 책임질 수 없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예술영화는 자기가 알 수 있는 한계 안에서 그냥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차이밍량의 구분에 따르면 나는 한 번도 상업적인 글을 써본 적이 없다. 애초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가 자가치유였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내 글은 지극히 사적인 경험과 취향으로 가득 차 있다. 문제는 그런 경험과 취향이 대중적이기보다 컬트적이라는 에 있다. 볼륨이 작은 사건, 미니멀한 전개, 고독한 인물, 복잡한 심리 묘사, 모호한 결말 등이 내가 쓰는 이야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걸 선호하는 제작자는 내가 아는 한 거의 없다. 소설의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낫지만, 영화는 거대 자본이 들어가는 매체이다 보니 이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다. 더불어 신인 작가에게 보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영화계 분위기를 고려하면 이것은 사실상 데뷔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러나 글쓰기의 성향을 바꾼다는 것은 사람의 성격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글을 쓰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어떤 흐름이 나타나게 되는데, 대부분 자신의 고유한 성향과 취향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내게는 문장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언제 문단을 나눌 것인가, 어떤 단어를 사용할 것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고민보다 어떤 플롯과 사건 그리고 인물이 상업적인 호소력을 지니는가에 대 고민 때 씬 더 고통스다.


특히 시나리오의 경우 아주 긴 시간 동안 작업해야 하기에 마음에 내키지 않는 작품을 끌고 가는 것은 일반인이 차력이나 서커스를 하듯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여전히 상업적이지 않은 글을 쓰고 있다(고 합리화한다). 우선 상업성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제거하고 나면 글쓰기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는 게임처럼 재밌고 흥미로운 일이 된다.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든 우회적으로든 거침없이 쏟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판타지와 소망을 마음껏 녹여낼 수 있으니 재밌지 않을 수가 없다. 다만, 이 경우에도 고충은 따라오는데, 특히 나처럼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미국의 탁월한 영화감독 제임스 그레이는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고증하듯이 찍은 영화 <아마겟돈 타임>에 대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더 나아진 세상을 보고 싶다면 정직하게 돌아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향수라고 부를 만한 걸 없애고 싶었다. 맑은 눈으로 돌아보고자 했다. 진짜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세상을 진정으로 반영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이 괴로운 이유는 제임스 그레이가 지적한 것처럼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치부와 도덕적 결함을 직시해야 하고, 자신에게 가해졌던 온갖 폭력들을 다시 떠올려 이따금 그것을 음미해야 한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나로서는 이 과정에서 더 큰 우울감에 휩싸이곤 한다. 그래서 가끔은 이 사적 기억을 미화하고 보정하려고 몸부림친다. 또한 과거를 낭만과 노스탤지어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 진실과 성찰이라는 중요한 두 가지 가치가 이야기에서 완전히 상실되고 만다. 때문에 우직하게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불우한 과거, 비극적인 선택, 그것에 영향받아 만들어진 우울한 캐릭터.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해 마감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 평소보다 더 우울하게 보낸다. 그러나 완성된 초고를 퇴고하기 위해 다시 글을 읽으면서 그것이 곧 나를 규정하는 진정한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침내 종착지에 도달했을 때, 나는 글을 쓰기 전보다 성숙해져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성숙이란 치유를 함유하고 있기에 이 지난한 과정은 종국에 자가치유로 이어진다.


그러나 상업적인 글을 쓰려고 발버둥칠 때는 그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상업적인 글을 쓴다는 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 색깔의 옷을 입고서 어떻게든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일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를 위한 글과 타인을 위한 글, 이 두 갈래 사이에서의 방황이 내가 글을 쓰며 겪는 참혹한 딜레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일장일단이 있다. 지금 내게는 어떤 양태의 글쓰기가 필요할까. 한동안 고민한 결과 아직은 치유의 글쓰기가 내게 더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추측건대 우울증이라는 병이 나를 치유에 강박적으로 몰두하게 만드는 면도 있는 것 같다. 언젠가는 양면을 다 아우르고 싶지만 적어도 현재는 치유의 글쓰기에 매달리는 편이 조금 더 나다운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박찬욱 감독의 가훈처럼 ‘아니면 마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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