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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Aug 03. 2023

왜 영화였을까


왜 영화였을까



나름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던 내게 영화라는 운명이 다가온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겨울방학 내내 모의고사 성적을 올리기 위해 열심이었던 나는 3월 모의고사에서 반에서 1등, 전교에서 16등이라는 높은 성적을 거뒀다. 특별한 이유가 있진 않았다. 그냥 공부하는 시간이 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내가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다. 공부하는 게 너무 싫었던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그만 문제집을 덮고 공상에 빠지곤 했다. 그때까지 나는 시인을 꿈꾸고 있었기에 메모장에 수시로 볼품없는 시를 써댔고, 가끔 수필이나 소설 비스름한 것도 썼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한 나로서는 수능 공부를 한다는 건 나이를 먹으면 군대에 가듯 으레 하는 것 정도로 여겨졌다. 그래서 할 만큼만 했다. 그러니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육열이 워낙 높았던 집안 사정으로 인해 어릴 적부터 학업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더군다나 네 살 터울의 엘리트 형이 일명 스카이 대학 중 하나에 진학하면서 부담감은 더욱 커졌다. 그런 압박 속에서 고등학교 3학년 3월 모의고사에서 뜻밖에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것이다. 일순 내게도 희망이 찾아온 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학업을 이어가던 어느 날, 4월 모의고사를 앞두고 순전히 기분 전환 목적으로 영화 한 편을 찾아보았다. 박진표 감독의 <너는 내 운명>이었다. 지금 보면 지나치게 통속적이고 유치한 영화라 코웃음이 나올지 모르지만, 당시 본 영화가 50편도 되지 않던 내게 그 영화는 일주일 동안 머릿속에 배경음악이 맴돌 정도의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원하지 않은 학업과 불우한 가정사, 미끄러지는 교우 관계 등으로 극도의 외로움을 느끼고 있던 탓일까. <너는 내 운명>에서 묘사된 사랑은 온전히 내가 원했던 형태는 아니었지만, 일부는 그러했다.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미치도록 사랑받고 싶은 본능. 사회의 편견과 부조리에 맞서 싸우고 싶은 욕망. 나는 <너는 내 운명>을 보며 내가 외면하고 있던 무의식적 욕망이 마음 한편에 단단히 응어리져 있음을 느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열렬히 원하는지,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 본질과 본성에 대해 꽤 고민했다고 자부했었는데, 실제론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받았던 감동을 다른 사람과 똑같이 나누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토록 중요한 시기인 고등학교 3학년 4월에 영화과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곤 6월부터 영화과 입시 학원에 다녔다. 현장에서 사용하는 영화 용어와 영화사를 공부했고, 시놉시스와 비평썼으며, 남는 시간에는 고전 영화를 보았다. 성적은 당연히 수직 하강했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은 내가 영화과로 진로를 바꾸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큰일 났네, 큰일 났어.”



한 유튜브 방송에서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인생을 바꾸는 영화 같은 건 없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나는 한 편의 영화, 혹은 연이은 몇몇 영화들로 인해 인생이 완전히 바뀐 경우였다. 인제 와서 그때의 결정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건 의미 없는 일인지 모르지만, 간혹 왜 하필 영화였을까,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구체적인 이유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영화를 해야 한다, 꼭 그래야만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가 나를 완전히 잠식시켰던 것밖에는 모르겠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내가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았다면 영화판에 들어가지 않았을 거라는 점이다. 위에 기술했던 것처럼 처음에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인생에서 가장 우울했던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내면을 치유하기 위해 시를 썼다. 생각을 정리하고, 고민을 토로하고, 응어리진 감정을 토해내는 일련의 과정이 내겐 어떤 위로와 응원보다 힘이 됐다. 그때부터 예술이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 이런 괴상한 생각도 했다. 나는 예술을 하기 위해 불우한 것이다. 불우함이 창작의 동력일지도 모른다.


다른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영화 속에 몰입하다 보면 나에 대한 이해, 더 나아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종국적으로 내가 욕망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렇게 되면 인생의 우선순위가 결정되고,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대가 이뤄진다. 이 순환이 반복되면 영화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발견하는 순간이 오고, 어느 순간에는 영화를 만나기 전보다 삶이 조금 더 윤택해졌음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다만, 이 해석은 영화와 처음 만났을 때의 감응을 제대로 설명해주진 못하는 것 같다. 또한, 이러한 지적 탐구는 영화를 보는 데 있어 언제나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일본의 순수문학 작가 미야모토 테루는 본인의 에세이에서 일본의 문예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가 <덧없다는 것>에서 쓴 다음의 글을 인용한다. “해석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만이 아름답다.” 여기에 미야모토 테루는 덧붙인다. “매우 지당한 말이다. 무조건적으로 상대를 매혹시키는 것이야말로 아름답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언제나 새롭다.” 내가 영화에 빠진 건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매혹적인 속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감정적으로든 미학적으로든 영화는 어떤 매체보다 관객을 단숨에 매혹시키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 그 굉장한 마력은 뛰어난 평론가나 위대한 소설가조차도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다. 얄팍한 언어의 표현력으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마법 같은 무언가가 영화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 <멀홀랜드 드라이브>, <언더 더 스킨>, <홀리 모터스> 같은 영화를 두고 온전히 논리와 이론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건 사기다. 비단 이미지로서의 매혹뿐 아니라 여기에는 기이한 마력이 숨겨져 있다. 이는 지나칠 정도로 은밀하고 치밀하며, 심지어 초현실적이어서 인간의 오감으로는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외계의 감각처럼 작동한다. 말하자면 위대한 영화는 해석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대신 관객을 매혹시킨다. 그래서 눈부시게 아름답다.


자기 치유와 매혹에 대한 이끌림. 내가 영화를 운명처럼 끌어안은 이유는 이렇게 두 가지였던 듯하다. 안타깝게도 영화가 지닌, 더 나아가 예술이 지닌 이 아름다운 두 가지 요소를 요즘 사람들은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말초적이고 휘발적인 즐거움을 치유라고 오해하는 것 같고, 매혹에 대한 이끌림 대신 해석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것 같다. 참 불행한 일이다. 관객을 치유하지 못하고, 매혹시키지 못하는 영화는 좋은 작품일 수 없다. 바꿔말하면 나는 관객의 영혼을 치유하고, 그들을 매혹시키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적어도 그와 유사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 그러니 나는 영화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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