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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Apr 14. 2023

철저히 혼자 불행하기


철저히 혼자 불행하기



교통사고로 전신 마비가 된 정신의학 전문가 대니얼 고틀립은 자폐증을 앓는 손자에게 보내는 책 『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가 어두운 터널에 있을 때,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 터널 밖에서 어서 나오라고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기꺼이 내 곁에 다가와 나와 함께 어둠 속에 앉아 있어 줄 사람. 우리 모두에겐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삶의 지혜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이 감동적인 격언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명확히 공표하는 듯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지금껏 이런 사람을 본 적도 이와 관련된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오히려 남의 불행에 심드렁하게 반응하거나, 심지어 그 불행을 부추기는 광경만을 보았을 뿐이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우울한 시기였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나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친구들과 당구를 치곤 했다. 그러나 실력이 엉망인지라 항상 지기 일쑤였고 그날도 꼴찌를 면하지 못했다. 기대보다 더 처참한 경기력으로 일관했던 나는 일순 우울의 층이 몇 겹 더 생긴 것처럼 암담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꺼내선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자살할까…….” 불우한 내 가정사를 제대로 알고 있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한 친구는 한심한 표정으로 나를 깔보며 이렇게 답했다. “안 하기만 해 봐.”


이후, 나는 그 친구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자살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에 빠졌다. 내 심란한 마음에 공감해주기 바랐던 것이었는데, 트라우마로 남을 끔찍한 폭언을 하다니. 그러나 나는 끝내 자살하지 못했다.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살 기도는 셀 수 없이 많이 했지만, 그것을 실제로 이행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깟 자살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한스러워지기까지 했다. 그 분통은 화마가 산을 태워 없애버리듯 내 마음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사람을 더욱 믿지 못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쉽게 판별한다. 예컨대, 불행 콘테스트라도 개최한 듯 타인의 고통 위에 본인의 고통을 위치시키려는 경은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들에게 본인의 고통은 무엇보다 끔찍하고 공포스러우면서도 남에게 자랑처럼 떠벌릴 만한 특별한 기억이다. 아무래도 이런 유형의 사람은 타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이만큼이나 고통스러웠어. 그러니 네가 겪은 고통은 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불행의 영역에도 약육강식의 원리가 적용된다. 더 불행한 사람은 위대해지고, 덜 불행한 사람은 초라해진다. 그러나 우습게도 불행의 척도를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다소 너그러운 사람과 대면하더라도 고통에 대한 뚜렷한 치유를 얻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다. 그들 대부분은 위의 경우처럼 폭력적이진 않지만, 그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으며, 또한 그 고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내밀한 목소리를 낼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상대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는 청자의 위치에서 소심한 리액션만으로 대화에 참여하게 된다. 이 경우 불우한 사연과 혼란스러운 속사정을 한껏 쏟아냈어도 무언가 해결되지 않은 찝찝함이 남는다. “지금 누구와 말하고 있는 거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는 하는 걸까?” “전혀 관심이 없지만, 예의상 들어주고 있는 게 분명해.” 요컨대 심연의 고통이란 그저 들어주는 행위, 그리고 위로의 몇 마디로는 절대 해결되지 않으며, 타인과 공유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완전히 고립되어서 다른 사람은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철저히 나만의 괴로움이다.


운명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끝까지 해결해보려는 건 미련한 짓이다. 대니얼 고틀립이 말한 ‘내 곁에 다가와 나와 함께 어둠 속에 앉아 있어 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헛된 희망은 그것의 몇 배에 달하는 절망과 고독으로 돌아온다. 그러니 우리는 심연의 고통에 관한 한 철저히 혼자 불행해질 필요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무능한 방식이 가장 덜 아프고 덜 고독한 최선의 방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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