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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May 05. 2023

아메리카노 한 잔


아메리카노 한 잔



애초에 원대한 행복은 꿈꾸지 않았다. 아니, 그럴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저조한 성적을 문제 삼으며 허구한 날 나와 형을 때렸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엄마마저 구타했다. “아빠를 교체하고 싶다.”라는 생각은 더욱 부정적으로 변해 차마 입 밖으로 내뱉기 어려운 끔찍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정말 충격적이었던 순간은 따로 있었다. 아빠에게 그토록 얻어맞았던 엄마는 아빠와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내게 다가와 아빠의 폭력을 옹호했다. 그러면서 외려 나를 문책했다. “그래도 아빤데 먼저 말도 걸고 그래야 하지 않겠니. 아빠가 다 사랑해서 그런 거야. 지금 후회하고 계셔.” 그 몇 마디에 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엄마에 대한 연민은 증오로 바뀌었다. 이제 집 안에 의지하고 기댈 만한 존재가 없다는 가혹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집 안에서 나는 묵언 수행을 하는 수도승과 다를 바 없었다. 때로 말을 하는 법을 잊어버린 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런 탓에 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이 무거운 쇳덩이를 옮기는 일보다 힘들었다.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을 피해 다녔고, 혹여 피치 못할 사정으로 사람을 만나야 할 때는 시도 때도 없이 눈치를 보았다. 나한테 말이라도 걸려는 기미가 보이면 나는 마치 군대 선임 앞에 선 후임이라도 된 것처럼 눈을 번쩍 뜨고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무어라 말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가능하면 내게 말을 걸지 않길 간절히 기도했지만,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러한 바람은 필연적으로 어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0여 년을 살았다. 주변에 남아 있는 친구는 몇 명 없었다.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내가 대화하는 상대는 대부분 내면의 자아뿐이었다. 대개 내면과의 대화는 부정적으로 흘렀는데, 이를테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시궁창 같은 현재의 모습을 경유하여 비극적인 과거와 마주하면서 진창에 빠지게 되는 식이었다. 절망적이게도 그러한 부정적 내면 탐구의 여정은 매일 반복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는 중증의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별다른 생각 없이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을 찾았다. 처음 보는 여성 디자이너가 친절하게 나를 안내했고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그녀는 내게 학생이냐고 물었다. 나는 덤덤하게 내일모레 서른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정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녀는 내가 너무 동안이라 깜짝 놀랐다며 진심으로 부럽다고 말을 이어갔다. 나는 부끄러웠지만, 선한 얼굴에서 튀어나온 그녀의 짧은 칭찬이 싫지 않았다. 아니, 너무 좋아서 계속해주길 바랐다. 그녀는 그런 내 마음에 응답이라도 하듯 “인기 많으시겠어요.”, “얼굴이 진짜 작으세요. 너무 부러워요.”라는 식으로 이런저런 칭찬을 계속 늘어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커트를 전부 마치고 나서는 자신의 역량을 자조적으로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얼굴이 다했네요.” 그녀는 사랑스럽게 미소 지으며 마지막까지 나를 치켜세웠다. 누군가는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영업용으로 으레 건네는 말치레나 이성적인 관심을 표현하는 음흉한 작업 멘트가 아니었다. 선한 마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심이 담긴 칭찬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뭐라도 마시겠냐며 몇 가지 음료를 제안했다. 이미 그 미용실을 수차례 방문한 적 있는 내가 처음 받아보는 서비스였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부탁했다. 카페에서 흔히 파는 톨 사이즈보다 한참 작은 용량이었지만, 그녀가 건넨 아메리카노는 내가 지금껏 마셨던 것 가운데 가장 특별한 것이었다. 미용실을 나온 나는 주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길을 도보로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부드러운 햇살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나는 쭉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그동안 쌓여있던 서러움이 말끔히 날아가는 것 같았다.


다음 머리 자르는 날이 되었을 때, 나는 예약 어플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사이에 다른 미용실로 이직한 듯 보였다. 그녀의 이름은 더 이상 어플에 뜨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짧은 인연을 끝으로 그녀의 칭찬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도 그녀가 건넸던 칭찬과 아메리카노 한 잔은 크나큰 힘이 되었다. 그때 깨달았다. 꼭 슬펐던 만큼 기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선함이 행복을 만든다는 것을. 지금도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면 그녀의 선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면 괜히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알 수 없는 힘이 생긴다. 언젠가 그녀를 만나게 되면 꼭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싶다.


“그때 아메리카노 잘 마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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