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J.
중환자실에서 콜벨을 누를 만한 환자는 많지 않다. 대부분은 의식이 없거나 레미펜타닐이나 프로포폴 같은 약물로 진정된 상태다. 가끔 의식이 멀쩡한 환자들이 중환자실에 체류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루 이틀 들렀다 가는 그들 왈, 이구동성으로 힘들었다고 호소한다. 흔히 '중환자실 증후군(ICU psychosis)' 등으로 논의되고 있는데, 맨 정신으로 침대에 누워있는데 바이탈 기계며 수액펌프며 온갖 기계가 시끄럽게 울고, 심폐소생술을 한다고 우르르 의료진들이 몰려들거나 옆자리 사망환자의 곡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에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까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옅어진 기억을 천천히 되뇌이며, 한 손에 콜벨을 쥔 어느 한 여인의 이야기를 회상해 본다.
내가 나이트 번으로 출근했을 때 그는 막 수술방에서 나온 때였다. 그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추돌사고 뒷좌석 가운데에 있었던 그는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괜찮아 보였지만 점차 숨이 차고 숨쉬기 힘들었다. 곧 흉부/복부 조영제 CT를 찍었고, 횡경막이 찢어지고 내부 출혈로 숨을 제대로 쉬질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응급수술행.
찢어진 횡경막을 봉합하고 혈흉(Hemothorax)로 흉관을 2개나 꽂았음에도 반대쪽도 혈흉이 생기는지 흉관을 꽂네 마네 준비를 하고, 이와중에 혈압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인계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달려들어 승압제란 승압제는 모조리 달고 플라즈마(plasma)며 생리식염수며 죄다 때려부은 것 같다. 다른 선생님들이 RBC와 혈소판제제를 쥐어짜며 응급수혈을 했다. 농담 아니고 혈액은행에서 "선생님, 이 환자 30분만에 혈액 또 타가는거 맞아요?" 전화가 올 정도였다.
흉부외과 애드워드 교수와 나는 자정 넘게 환자 옆에 붙어 있었지만 혈압은 60/30에서 도통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노르핀을 올리죠." "에피를 올려볼까요."
도부타민, 도파민, 바소프레신... 사실 선택지는 쓸만큼 쓴 상태였다. 수술방에서 때려부은 것만 18리터였다.
"복압 얼마나 올랐죠?" 소변줄로 재는 요역동압은 25cmH2O까지 올라 있었다.
그의 연락에 외과 교수 마거렛이 도착하고 환자 상태를 살피더니 복부 내부 출혈과 구획증후군이 의심된다고 했다. 새벽 두 시 재수술행. 새벽 다섯 시에 개복한 채로 돌아온 환자는 더이상 혈압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날 나이트, 깊은 잠에서 그가 깨어났다. 입으로 기관내관을 꽂고 있어 말은 하지 못했지만 진정제와 진통제가 들어가고 있기에 아프냐고 묻자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다 살아나셨어요. 고생했어요!"
퇴근길에 보호자 휴게실에서 쪽잠을 자던 따님과 눈이 마주쳤다. 퉁퉁 부은 눈으로 어머니가 어떤지 조심스럽게 묻자 면회하실 때 놀라실거라고 말씀드렸다. 이미 충분히 울어 충혈된 눈이 다시 젖었다.
그는 석 달하고도 열흘 넘게 우리와 함께했다.
개복했던 배를 닫는 수술을 하고 승압제를 하나하나 줄여 끊었다. 에피네프린, 바소프레신, 도파민, 도부타민... 수액걸이대에 열매처럼 주렁주렁 열린 시린지펌프(Syringe pump)를 하나하나 떼어냈다. 혈압은 잡혔는데 이번엔 혈변을 보게 되서 오랫동안 수액 비정주영양으로 식사를 대신했다. 그는 거진 두달동안 혈변으로 고생한 것 같다.
기계환기 이탈(weaning)은 더뎠다. 기관내관을 오래 가질 수 없기에 3주 즈음 되어 기관절개관(Tracheostomy)을 시술했다. 조금만 산소와 압력을 낮춰도 그는 숨쉬기 힘들어했다. T-piece를 적용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숨을 껄떡이며 얼굴이 빨개진다. 내상을 입어 마비된 횡격막은 제대로 수축하지 못했다.
기계환기 이탈과 더불어 재활도 시작되었다.
침상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두 달 만에 침상에서 두 발로 서봤다. 재활의학과 팀과 함께 워커(이동보행기)를 잡고 첫 걸음 떼는 아기처럼 아장아장 중환자실 복도를 거닐었다. 중환자실장 영(Young)교수가 복도에서 마주친 그에게 따봉을 날려준 것이 기억난다.
- 그는 너무 연약한 존재가 되었다.
재활하는 시간보다 침상에 누워 천장을 보는 시간이 더 길기에, 사고에 대한 끔찍한 기억과 쇠약해진 육신에 그는 불안하고 우울해져 갔다.
대부분의 시간을 침상에 누워있던 그에게 콜벨은 기관절개관으로 인해 잠긴 목소리를 대신해 유일하게 우리와 소통하는 버튼이었다. 가래를 빼달라는 것부터 침대 높낮이를 조절해 달라는 사소한 것까지. 그는 콜벨을 눌렀음에도 바로 오지 못하는 간호사들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예민해진 그는 수면제를 먹어도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환자의 불면증과 불안 증세가 심해지자 영(Young)교수는 낮동안 보호자분께 상주를 요청했다.
생업을 뒤로한 채 리버풀에서 온 따님은 근면하고 강인한 사람이었다. 런던의 비싼 셋방살이를 감내하고 매일 아홉시면 출근(?)해서 저녁 늦게까지 환자와 함께했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그의 뒷바라지가 정서적으로 큰 지지가 되었을 것 같다.
"숨이 차요."
기관절개관을 닫고 본인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려주었을 때, 혈압이 뚝뚝 떨어지던 첫날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듯 지나갔다. 지옥과 같았던 그날 밤, 살아나셔서 정말 감사할 다름이다.
근 석달 반을 우리와 함께했던 모녀는 병동으로 떠났다. 조촐한 환송식이 열렸다.
몇달이 지나 면회시간에 낮익은 얼굴들이 나타났다.
오랜만에 그와 따님이 내려와 우리들에게 인사했다. 병동 생활을 마치고 연고지의 재활병원으로 전원간다고 한다.
최악의 사고를 당했지만 기적처럼 살아난 그와 헌신적으로 간병한 따님께,
불의의 사고와 중환자실에서 겪었던 힘든 시간이 언젠가는 무딘 기억이 되길 바란다.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올 날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