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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더언니 Feb 06. 2019

스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되다 2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나는 한국인이지만, 해외에서 지낸 나날들이 더 많은 TCK (Third Culture Kid)다.


어느 순간부터 길에서 들려오는 언어가 한국어일 때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으며,

어딜 가든 스스로 분리수거를 해야 하는 것,

조용하게 신속하게 많은 것을 하는 아침의 풍경,

어느 매장을 가도 로봇 같은 친절함,

겨울이면 애벌레마냥 다 똑같이 보이는 롱 패딩을 입고 있는 사람들,





나는, 한국이 낯설었다.






프랑스에서 아직 졸업을 하지 않았던 그때, 조금 더 오래 프랑스에 거주를 하며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나, 대학원에 진학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을 때,  뭄바이에 위치한 한국 대기업에서 연락이 왔다. 인도 거주 경험이 있는 한국인 신입을 뽑고 싶다고 말이다.


한 달 $1,500에 상응하는 집도 제공해주고, 출퇴근 차도 제공해주고, 봉급도 잘은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정확히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

그 간판에 이끌려, 그 대우에 이끌려 쉽게 결정하였다. 주변에서 축하해주니, 그래 잘한 일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일 년이 넘어가며,

나는 점점 눈치를 보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좁아터진 한국 교민 사회.


내가 누구와 밥을 먹는지, 누구와 클럽에 갔고, 누구와 데이트를 하는지, 온 교회 집사님들의 수군거림을 들었고, 유부남들은 그 좁은 한인 사회 중 유일하게 직장인 아가씨 신분이었던, 스물다섯 어린 나의 일상을 안주로 씹어먹었다.




내가 속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의 저질스러운 더러운 농담을 마침내 누군가의 입에서 듣게 되었을 때,



나는 당장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만 하였다.



내가 옷을 무엇을 입던, 무엇을 먹던, 누구를 만나는 것에 대한 눈치가,

어느 순간 감옥이 되었고,

휴가가 끝나고 뭄바이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내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같이 느껴져 가는 내내 흐느껴 울던 기억이 난다.


억지로 견디다 보니, 몸에 이상 반응이 생겨 염증이 온몸을 파충류처럼 덮었고, 어느 병원을 가도, 나는 조직검사를 받아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은,

한국 사람들은,

한국 문화는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맞지 않다'는 정의를 내리고,

나는 한국을 '집'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선진국이어도 느려 터진 행정과 인터넷으로 속 터지게 하는 프랑스,

불친절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중국,

집단 성추행과 사고를 당해 이가 통째로 뽑혀도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인도이지만,


그 험한 꼴을 당하고도,

나는 해외가 나에게 맞다고 정의 내렸다.


그냥, 차라리 이게 편하니까.


한국보다 해외에서 지내는 나날과 일상이 더 많이 쌓여가며, 눈치 보는 것, 보이지 않는 감옥 같은 곳에 갇혀있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는 괜찮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 나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해 주었던 상해.

상해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며,

천천히, 느리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내가 하고 싶던 공부를 하며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때부터 블로그와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되었고, 

매주 재즈 공연을 하게 되었다. 글을 쓰다 보니 상해에서 사업을 하시는 분들께서 비즈니스 회의, 컨설팅 통역 일도 많이 맡겨주시게 되었고, 그 모습을 보고 또 자녀들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하셨다.

끼가 많은 것을 알아챈 학교에서는 학교 유학생 대표 모델이 되어달라고 요청이 왔고, 그 뒤로 연기를 하고 방송에 나가고, 또 비누까지 만들어 장사하며,



그저 취미였던 혹은 나의 삶의 일부라고만 생각했던 이 모든 일들이 회사에 가지 않고도 많은 -오히려 회사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게 해 주었고, 스스로 대견할 정도로 내 삶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렇게 굳게 쌓인 믿음이,

만리장성 성벽과도 같이 건실했던 나의 행복의 정의가.


2017년 12월.


와르르, 무너졌다.

 





이런 남자 만나지 마라,라고 글을 썼던 내가,


이제는 평탄하게 잘 살길 그렇게나 바랬던 내가.

세상에서 이런 일이! 혹은 그것이 알고 싶다 에서나 보던, 사람이길 포기한 듯한 사람에게 천하의 호구가 되어있었다.


공안에 다급하게 연락을 했지만, 아직 칼에 찔리지 않았기 때문에 협박만으로는 보호 요청을 할 수가 없었고, 영사관에 신고를 해도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했다.



공동체가 간절해졌다. 조금 따분해도 괜찮으니까, 내가 출근을 하지 않으면 바로 연락을 해주는 사람들이 생기길 바라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릇, 손수 골랐던 가구,

초등학교 때부터 어딜 가든 꼭 끌고 다녔던 나의 옷들, 행복이고 뭐고,

나를 당장 죽이겠다는 사람 앞에서 그딴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다.



내 고향과도 같은 곳을, 사람들을,


그렇게 하루아침에 버리고 오게 되었다.









일 년이 지났다.


내가 정의했던 행복에서 벗어나,

'맞지 않다'는 정의를 내렸던 한국에서,

그리고 정말 죽을 만큼 견뎌야 할 것만 같았던 한국 조직에서,


지금 여기서 행복해하고 있다.

그리고 매일 다르게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다만, 맞지 않다고 정의했던 지난날과 다른 것은 적응하려는 발버둥 침이나 이 악물고 버텼던 노력보다,


이젠 그저 밤길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지금이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아직도 음악이 나오면 몸이 먼저 두둠칫 반응을 하고, 글을 쓰는 시간에는 나의 마음을 담고, 아직도 TV를 보면 연기를 하고 싶고, 방송을 하고 싶지만.



서른셋.


"나는 이래야 행복해."

라고 정의했던 지난날을 반성하고,

나의 행복을 벌써 함부로 정의하고 가두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살아갈 날에 나에게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태어날지 태어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어떤 책을 쓰게 될지 모르지만,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행복'이라는 정의를 위해,


그래도 매 순간 최선을 다했던 지난 일 년을,

꼭 이야기해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가 누군가를 꼭 안아줄 수 있다면 좋겠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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