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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스더언니
Jun 15. 2020
인생에서 잘했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좀 놀아본 서른넷 언니가
어느새 서른 넷이다.
ㅅ 받침이 들어가면 중반
이고 ㅂ
받침이 들어가면
후반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른, 서른 하나, 서른둘까지
초반에
잘 우려먹었던 '서른 즈음의 어느 싱글' 나의 타이틀은 더 이상은 유효하지 않다.
결혼도 하였고, 빼박 유부 아줌마가 되었으니까.
우리 엄마는 지금 내 나이 때 9살인 오빠와 세 살인 나를 기르고 있었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져서 여자 서른이 사회적으로도 먹히는 숫자라 하더라도,
생물학적으로의 나는
,
아무리 곱게 화장을 하고 사기 어플로 셀카를 찍어도,
거울 속에 실제 나를 마주할 때 오지게 오는 현타는 피할 수 없다.
다이어트를 해도
예전같이 쭉쭉 빠지지도
않고,
9센티 힐을 신고 클럽에서 밤새 춤추고 첫차 타고 집에 가던 과거의 나를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 살이라도 어렸던 그때의 예쁜 나는 시들어가고 있으나,
그래도 괜찮다.
놀아볼 만큼 놀아봤고,
아파볼 만큼 아파보며,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지독히 싫어하고 못하는지,
어떤 사람을 만나면 안 되는지 확실하게 알게 되지 않았는가.
+여기서 노는 것에 대한 정의를 니들 맘대로 함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길
바랍니다
.
https://brunch.co.kr/@shanghaiesther/72
아 참고로, 앞으로 이따구로 제글에 댓글 다시는 분들은 경고 없이 고소할 예정입니다.
늘 '엄친딸'의 정석으로 모범생으로만 반듯하게만 자라오고
명문대 출신에 환갑이 넘어 박사까지 클리어한 우리 엄마는,
엄마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별난 나를 기르며 "너도 너랑 똑같은 딸 낳아 길러봐!!"라고 저주(?) 아닌 저주를 하였으나,
사실 우리 엄마가 놀아본 언니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에게 언니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늘
한켠
에 하고 있었다.
맞다.
다재다능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나는 누구보다 미련한 곰팅이다.
꼭 불에 들어가 봐야 불이 뜨겁다는 것을 안다.
누구나 다 아는 뻔한 지혜를 몰라 수없이 망해보았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인터스텔라의 머피처럼 모스부호를 보내서라도) 다시는 하지 않을 멍청한 짓도 참 많이 해봤고, 절대 인생에서 엮여서는 안 될 최악의 사람도 만나보았다.
감출 때엔 감춰야 한다는데,
이렇게 속이 훤히 보여 속기도 잘 속아서 늘 하이에나 같은 사람들의 타깃이 된다.
거기다가 관종기까지 다분하여 흘러가는 순간순간을 이렇게 글로 남겨야만 직성이 풀린다.
이 글 역시 기록이 되어 나중에 이불 킥을 하게 될 흑역사가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처럼 어디선가
아파하고 있는 스무 살의 언니가
이런 글을 보고 위로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은 변한 적이 없다.
먼저 아파본 나만큼 후회하지 말라고.
나보다는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으로 조금씩 끄적이게 되었다.
결혼하기 전, 해외에 사는 흔한 싱글 여자로서 살아내며 수없는 망함 열매를 먹고 토해내는 과정 속에서 내 삶에서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를 공개하려고 한다.
1. 글을 쓰는 것. :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을 매일의 목표와 꿈으로 삼으며,
나의 망한 지난날이라도,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누군가 나의 글을 가볍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맞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도 한국에서의 국어 교육은 중학교 1년까지가 전부이므로, 나의 글은 늘 쉬운 단어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누군가 맞춤법이나 문법을 지적할 때에, 할 말이 없다^^^
애초에 완벽함을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
잘 쓴 글 보다, 좋은 글을 쓰고 싶었다.
갖춰진 글보다, 마음이 흘러가는 글을 쓰고 싶었다.
늘 그랬다.
늘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왔다.
나의 작은 마음들과 삶의 조각들을 브런치와 블로그를 통하여 공개하는 데엔 어느 때엔 많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누군가를 응원하기 위해 한숨처럼 써 내려갔던 그 끄적임 들은 오히려 오늘의 나를 위로해줄 때가 많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 참 감사하고 다행이라 생각한다.
'기록'은 내가 마주했던 사람, 풍경뿐만 아니라, 그때의 기분, 공기까지도 모두 담아주는 감정의 거울이다.
단순히 감정의 흔적을 남기는 것뿐만 아니라, 체한 마음을 솔직하게 토해내는 과정에서 영혼을 달래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다.
글은
나의 숨구멍이 되어주었다.
아, 내가 이랬지. 이렇게나 외롭고 힘들었
었지. 라며,
과거와 화해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2. 고양이를 기르는 것. :
정말 잘한 일이다.
생명의 귀중함에 대하여, 그리고 신비함과 책임감까지도 알게
되었다.
애기와 지낸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반평생 아프면 그저 이 악물고 혼자 버텨야 했다.
누구를 부를 수도, 응급실에 갈 수도 없을 때,
식은땀에 몸이 며칠 동안 저려져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럴 때마다 이 작은 아이는 나의 눈을 바라보며 손을 핥아주었고, 텃밭에 있는 치커리를 물어뜯어 내 머리맡에 두었었다.(지금도 그것이 우연인지, 이아이가 똑똑해서 나 먹으라고 준 것인지는 분간이 안됨)
그렇게 존재만으로도 소중한, 오롯이 내 편인 나의 가족이 생긴 것이다.
쉽게 싫증내고, 변덕이 심한 나인데,
이아이의 귀여움은 어디까지인지.
5년이 지나도 늘 새로운 귀여움으로 나를 설레게 한다.
중국에서 처음
이아이를 만났
을 때엔 3살 추정인 성묘로, 세 번이나 파양을 당했던 아이라고 했다.
학대를 당했는지 모르겠는데, 쓰다듬으려고 손만 들어도 한껏 움츠리고,
눈치를 보았던 소심한 아이 었다.
버려진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다.
그래서 협박받아 긴급히 한국으로 도망 나오는 가운데서도 나는 이아이를 쳐다보며,
"엄마는 너를 끝까지 사랑할 거야."라고 말해주었고, 두려워 덜덜 떠는 상황에서, 당장 이 아이를 급행으로 데려오는 수속부터 밟았다.
가끔 자랑스럽게 손바닥만 한 바퀴벌레나 잠자리를 사냥하여 집안에 물어오는 것,
털을 뿜어내는 것 마저도 사랑스럽다.
나만큼이나 이 아이를 사랑하는 남편과 눈을 마주치며, "우리 이 아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라며 웃는다.
3. 피아노를 치는 것. :
나는 집에 피아노도 없었다.
너무 서러울 때면 어두운 교회에 숨어 들어가 무작정 내 마음대로 피아노를 쳤다.
프랑스에서는 악기 가게에 들러, 아끼고 아끼던 용돈을 내밀며 연습을 해도 되냐고 물었다.
여전히 악보를 잘 볼 줄 모르고,
터칭도 엉망이고,
음악인들 틈에서 합주할 때 '그 코드가 뭐야?'라고 물어보면,
정작 내 손이 그리는 코드 이름을 나조차도 모를 때가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는 나의 평생에 가장 좋은 친구다.
그럴 때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이 미치도록 많은데, 억지로 또 삼킬 때.
감정을 글로 쓰는 것조차 버거울 때.
한 글자 한 글자 나의 감정을 분해하는 과정을 보는 것조차 괴로울 때.
누군가에게 털어놓기엔 아직 나의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을 때,
그러나 사람에게 감정을 털어놓을 때에는 부작용이 많이 생길 것 같을 때.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더라도, 어떤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에 대하여 '좋다 혹은 나쁘다'라는 생각이 먼저 생기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음악에 감정을 실어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가 담긴 곡을 몇 번이고 한참을 치고,
그렇게 울고 나면 정말 마음이 후련해진다.
나중에 언젠가 내 아이가 생길지 안 생길지 모르겠지만,
피아노 학원에서 대충 시간을 때우며 동그라미 몇 개 색칠하는 정도로 음악을 대하는 것이 아닌,
내가 평생을 친구로 삼아온 이 좋은 음악을, 내 아이 역시 친구로 대할 수 있게 알려주고 싶다.
4. 자취를 하며 요리를 하게 된 것. :
사실, 그 오랜 시간 동안 유학을 하며 나에게
'먹고 싶은 음식'이란,
내가 가장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가장 쉬운 질문이었다.
유학생활을 하면 엄청 바쁠 것 같지만, 사실 엄청 무료하다.
한국처럼 새벽에 문을 열고 밤새 노는 곳, no curfew
인 곳은 정말
드물다.
그리하여 '먹는 낙'이 엄청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데,
먹고 싶은걸 쉽게 먹지를 못하니 가끔은 정말 자다 일어나서도 순대가 그리워서 한참 잠을 설치기도 하고,
룸메와 마주 앉아 같이 먹고 싶은 리스트를 쭉 작성하는 것이 흔한 취미이기도 했다.
그 흔한 양념치킨, 떡볶이
....
이런 게 왜 이리도 외국에선 생각나고 먹고 싶은지......
급기야는 어느 날부터, 내
가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리를 하니 독거 청년들이 모이게 되기 시작하였다.
요리를
하고
, 사람을 얻었다.
좋은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좋은 추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요염함 자태로ㅋㅋㅋㅋㅋ
맛있게 먹어주는 룸메들의 열렬한 반응으로 인하여 나는 더욱더 많은 요리를 하게 되었고 나와 살았던 룸메는 사육당하여 1년 사이에 8킬로가 쪘다........ㅋㅋㅋㅋㅋ
그렇게 하나 둘 시작했던 음식이 많아지면서
이젠 요리하는 것이 나의 삶에 큰 활력을 가져다주는 취미이며, 지금도 스트레스를 받는 날엔 남편과 맛있는 요리를 해 먹는 것을 큰 낙으로 살고 있다.
남편과 연애할 때 처음 차려준 밥상
어차피 다 먹고살려고 하는 일인데, 바쁜 현대인의 삶 속에서 그나마 가장 많은 여유를 느낄 수 있을 때는 역시 '잘 차려진 밥'을 먹을 때가 아닌가?
요리로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줄 수 있게 되어 참 감사하다.
5. 다국어를 배워놓은 것. :
넬슨 만델라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만약 어떤 사람과 그가 이해하는 언어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그의 머리로 갑니다. 당신이 만약 그 사람과 그의 언어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그의 가슴으로 갑니다.”
나의 평생 변하지 않을 인생의 목적은 세계의 위로의 사람이다.
뭔 거창한 소리냐 할 수 있겠지만, 단순히 해결책을 주는 사람보다도 끝까지 같이 울고 같이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은 가장 따뜻한 위로임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자라서 입시나 취업에 치여 죽어라 토익이나 HSK만을 공부했다면 이런 생각을 잘 못했을 것 같다. 넓은 세상을 보며 깨달은 것은, 어차피 100세 시대에서, 세계는 점점 작아지고 더욱더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플랫폼으로 소통하길 원하고 있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
언어를
배우는 것이 더욱 신이 났다.
프랑스에서 내가 원하는 샌드위치 재료를 하나씩 넣어달라고 똑 부러지게 말할 때,
엄마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작은 아이가 위험하게 찻길에 뒤뚱뒤뚱 걸어가는 것을 보고 "조심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때.
인도에서 사기꾼과 같은 릭샤왈라에게 "이쪽으로 가지 마세요!! 여기 길 아니잖아!"라고 외칠 때나,
상점 주인과 한바탕 "나 이거 다 가격 알고 있어, 깎아주세요."라고 말할 때.
나는 이런 나의 모습이 좋다.
누구나 외치는 글로벌 시대에서, 자격증으로 증명되는 ‘중국어’와 ‘영어’를 스킬이 아닌,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6. 대기업을 다니다가 대학원을 가게 된 것. :
사실 지금도 면접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갔냐 이다.
몸이 아프게 되었다.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니
10년을 알고
결혼을 약속하였던 애인에게도,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라는 이유로 결국 이별 통보를 받았다. 그래서 내가 쌓아온 인생을 곰곰이 돌이켜볼 기회가 있었다.
사실 기계적인 하루가 매일매일 반복이 되어도,
하는 일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이대로도 썩 안정적이고 괜찮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마음 어딘가, 무언가가 조금은 찜찜하였어도, 벌이나 대우가 나쁘지 않았고 사람들이 ‘커리어우먼’이라는 나를 보는 시선도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인생의 정석을 밟고 있던 저 역시도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과연 70살까지, 대기업에서 배운 이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 계속 종이를 만지며 살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뭐지? 나는 음악을 다시 해야 할까?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뭐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름 내린 결론은,
나는 예술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남들이 '조금은 늦었다'라고 정의한 나이 스물여덟에 대학원을 선택하게 되었다.
미술경영을 전공으로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사실 훗날 이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이것으로 어떤 다른 직업을 가지게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배운 예술은 제가 쌓아왔던, 쌓아갈 '커리어'가 끝난 후에도, 음악처럼 여전히 내 곁에 남을 나의 평생 친구가 되었다.
확실한 것은 예전 같이 무작정 열심히 달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경험한 삶은, 지금은 몰라도 살아가다 보면 점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아도 먼 미래에 나의 과거를 뒤돌아 보면 그때 그 일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보인다는 믿음이 있기에, 그때 나의 삶을 멈추고 활동하였던 나의 모든 취미가 훗날 나의 특기가 되어 커리어가 될 거라 생각한다.
7. 신앙이 있는 것. :
교회는 잘나고 완벽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병들고 아픈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특히 나같이 미련한 '양'같은 사람은 더더욱이나.
양은 잘 넘어지고, 혹여나 발라당 뒤집어지면 큰일이 난다.
누군가 일으켜주지 않으면 곧장 매가 달려들어 내장을 쪼아 먹는다고 한다.
방향치에다가 시력이 나빠서 앞에 뭐가 움직이면 졸졸 따라가고,
잘
속기까지 해서
야생 개들이 교묘하게 좁은 골짜기로 몰아넣어 잡아먹는다고 한다.
양은
이렇게
방어력이 아예 없다.
성경에서 성도들을 '양'이라고 비유하는데, 딱 모질란 게, 나와 비슷하다.
그래서 내 삶에서 가장, 최고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신앙이다.
나같이 변덕 많고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은, 감정이나 내 느낌만을 믿으면 큰일이 나기 때문이다.
내가 신앙이 없었다면,
정말 막살았을 것 같다.
외로움을 가만히 들여다보기 전에, 외로우면 외로운 데로
내 기분대로
정말 닥치는 대로
누군가를 만나고, 술을
절제 없이
마시고,
내 마음대로
놀고, 공부도 남을 위한 것이 아닌, 오직 내가 뛰어나기 위해 했었을 것이다.
그렇게 옳고 그름을 나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멋대로 평가하고 그것이 사람을 아프게 해도 잘못된 것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나의 모든 확신보다 더 확실하고 절대적인 것을 마음에 품지
않았다
면 내 인생이 어땠을지,
나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날이 가면 갈수록, 내가 하나님을 믿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교회 다니는 사람"은 무작정 신앙을 강요하는 몰상식한 사람으로 몰아가는데, 너무 가슴이 아프다.
"교회 오세요. 교회 오면 예쁘고 참한 여자도 많아서 장가가기 좋고, 잘 나가는 사람이 많아서 인맥 쌓기도 좋아요"라고 말하는
현시대에서,
-다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
-
내가 믿는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싸구려 취급을 받는 것도 너무 속상하다.
진짜 좋은 건 내가 말 안 해도 사람들이 먼저 물어보는데 말이다.
내 주위 친구들은, 내가 교회를 다니라고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신기하고, 무언가 확실하게 믿는 것이 있어서 좋아 보이고 궁금하다고 말한다.
나는 많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삶으로 좋은 향기를 내며 살아내면 세상이 이보다는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를 어떤 형태로든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조금은 더 따뜻해지길 바라며 이 글을
쓴
다.
이상,
잘
놀아본
(아파본)
언니
스더
가.
당신의 하루 끝자락이 조금 더 따뜻해졌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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