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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더언니 Mar 26. 2017

느리게, 천천히

다니던 직장을 때려친, 어느 서른 여자 사람의 일상

#

늘 7시에 기상하여, 도시락을 싸고,

회사에 출근하여, 내가 잠든 사이 세계 각지에서 온 메일들에 답하다 보면, 어느 덧 점심시간이다.


컴퓨터 앞에서 5분 만에 아침에 싸온 밥을 입에 우겨넣고, 또 다시 전화를 받고, 엑셀을 뒤지고, 파일을 정리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 덧 퇴근시간.



개인의 시간이 주어져야 마땅한 퇴근 시간 이후에도, 나는 습관적으로 메일을 열어보고 있었으며, 밖에서 친구들을 만날 때에도 좁아터진 한국 사회 눈치를 봐야했다.


그렇게 눈치를 봤어도, 다음 날 부장님에게서 '어제 잘생긴 남자랑 같이 밥 먹었다며? 누구야 남자친구야?'

'저번에 그 베이글 집에서 같이 있던 예쁜 아가씨는 누구야? 회사에 한번 데려와~'




.......



이렇게, 가 '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2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

일을 그만 두고,

망가진 몸을 대충 추스린 뒤,

어떻게 먹고 살지 막막하여 무작정 다시 구직 활동을 하였고, 그렇게 다시 '조직'에 들어갔지만, 나는 또 다시 온 몸에 여드름이 파충류 같이 돋아나 눕기만 해도 티셔츠에 피가 물들었고, 이유 없이 온 몸에 멍이 이리 저리 생겼다.


나에게 '회사'는 정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엇을 해야할까 고민이 될 때,

학생만큼 좋은 핑계는 없을 것이다.

다시 학생으로 돌아와,

내가 하고 싶던 일들을 천천히 찾아내었다.


꼭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그 것부터 찾아내었다.


아침에 늘어지게 침대에 뒹굴며, 고양이와 눈을 마추는 것으로 일상을 시작하여,

커피를 내리고, 식물에게 물을 주고.

무엇을 먹을지 고민을 하며 장을 보러가고,

음악을 틀고 청소를 하였다.

그러다가 흥이나면 땀이 쏙 빠지게 집안 이곳 저곳을 쏘다니며 춤을 추고.

어두컴컴한 밤이 되면 집에 기르던 애플민트를 꺽어 가볍게 모히또를 만들어 마시며 피아노를 친다.

 

그렇게 천천히, 예전 같았으면 '게으름'이라고 불렀던 일상을 살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온몸에 한 가득이었던 염증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점차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천천히 자료를 만들다보니 벌써 책 한권 분량이 되었고,

주말에는 내가 하고 싶은 연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아침에는 발레, 저녁에는 와인 한잔과 함께 사람들과 어울리며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간간히 글을 쓰고, 간간히 놀러나가며,

새로운 취미가 생겨 비누도 만들기 시작했다.




빠르고 바쁘게 움직였던 나의 지난 날을 돌이켜 보았을 때,

정말 아무 것도 남지 않았지만.



느리며, 게으르고, 천천히 오늘을 살고 있는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남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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