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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더언니 Apr 11. 2018

당신의 아픔을 응원합니다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릴 때 참 많은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다독'이 답을 줄 거라고 생각하는 때가 있었다.


아픔에서 나오게 되었던 나의 갈망을 책으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기에.


심리학 책,

철학적인 책.

베스트셀러.

픽션 논픽션 다 가리지 않고 참 많은 책을 읽었다.



하지만 읽어도, 읽어도.

약간의 깨달음은 있었지만,


나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내 안의 갈망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처음, 환자가 병원에 갈 때, 의사는 당신의 병은 무엇입니다.라고 진단을 내린다.


치료의 첫 단계다.


내가 '아프구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하지만, '나의 문제는 이거야'라고 깨달음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데, 계속하게 되는 그것.

쉽게 말하면 그것은 결핍이며, 중독이다.


그것은 많이 아픈 것이다.


'앎'이 있음에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들의 가벼운 예는 술과 담배이며,


좀 더 나아가면, 여자 같은 경우 쇼핑중독, 폭식, 연애중독, 끊임없는 자책 혹은 연민, 우울증 등이 대부분의 증상으로 나타나며,

남자 같은 경우는 열등감, 그로 인한 허세, 섹스중독 그리고 다혈질과 같은 폭력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 그런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려면.... 이 것도 참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므로 대충 생략하겠습니다.)







퍼블릭한, 이런 여러 공간에 마음을 끄적이며.

(다짜고짜 말도 안 되게 예의 없이 들이대는 남자들 빼고) 참 많은 사람들에게서 댓글이나 쪽지를 받는다.



참 감사한 것은...


나의 공간에는, 아픈 마음을 가지고 찾아주시는 분들이 참 많다는 것이다.



다독을 함에도.

책을 읽음에도.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우리가 변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신이 나약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머리로는 '안돼'라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마음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머리로 '아니야, 나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아. 나는 내 의지로 끊을 거야.'라고 소리치고, 말해도.


가슴이 원하는 이상, 우리는 그것에서 헤어 나오기가 침 힘이 든다.



'좋아한다는 것'은 우리의 성격을 반영시키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주는 거울과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이 들 때까지 하루 종일 그가 보고 싶고 생각나듯이, 마음에 어떤 것을 품게 되면, 머리는 그것을 반사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머리로 억지로, 나는 이 것을 하지 말아야지. 아무리 결심을 해도,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원하므로, 언젠가는 우리는 그것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머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남을 쉽게 비판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했는데, 넌 왜 안돼?'

'넌 의지가 부족하구나.'

'이렇게 하면 돼.'


모든 맞는 말을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상처가 되는 것은.

사랑이 없는 조언은 아무리 '진리' 어도, 그것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말 그대로 우리에게 바늘이 되어 가슴에 콕콕 박히는 것이다. 푹신한 방석에 찔리는 사람은 없다.


가령 이런 것.


내가 남자를 쉽게 만나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인 것 같다.


나는, 아무리 능력이 있고 외모가 출중해도.


따뜻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끌리지 않는다.

대게, 세상에서 소위 말하는 '능력'있는 남자들은, 본인의 의지로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고, 그 과정을 거치는 사람에게 조언을 줄 때에, 해답을 던져주고 같이 기다려주는 노력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랑이 없는 조언은, 지식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머리에만 머물고 우리 삶에 실제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하지만, 경험은 흐르고 마음은 흐른다.

과거에 힘들고 아파본 사람은, 현재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다. 그 곁을 지켜줄 수 있다. 진정한 위로는,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함께 버텨주는 것이다.


'머리'나 본인의 '의지'로 현재를 누리는 사람은, 정작 본인의 능력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자책감을 주고 더 큰 중독으로 이끈다. 부모가 자녀에게 아무리 '게임중독'으로 잔소리를 하고, 폭력을 행사할 경우, 자녀는 더 그것에 빠지게 마련이다.


좋아하는 것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억압하며 바꾸려고 노력하면 더욱 부작용이 심해진다.


대게 우리 인생의 상처는, 우리의 사명과 연관될 경우가 많은데. 내가 좋아하는 독일 여성 작가 케테 콜비츠는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아픈 마음을 품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아픔이, 그녀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더 많은 이들의 치유가 되는 도구로 쓰였다.





결핍이란, 그런 의미에서 좋은 것이다.

아픔이란, 그리고 고통이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어도, 그 분량이 끝나면, 우리는 반드시 성장한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를 얽매게 하였던 과거의 좋아하던 그 무엇에서 점점 벗어나게 되며, 남들의 고통을 더 같이 공감할 수 있게 되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된다.



지난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나요? 그것은 언제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잠시 고민해본 뒤.



만약, 그때 그 상황이 주워졌더라도.

아마 지금과 똑같은 삶을 살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때로 돌아가도.

나는 여전히 아팠을 것이며.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만한 그릇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다해, 이렇게 응원하고 싶다.


나는 당신보다 더 나약하고. 더 부족하고.

그래서 많이 아팠고.

그래서 당신의 아픔이 무엇인지 다는 몰라도 조금은 안다고.


굳이 힘내지 않아도 되니까.


만약 당신 속의 눈물이,

밖으로 쏟아지지 않도록,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래서 천천히. 느릿느릿 걷고 있다면.



그냥 아플 때,

이렇게 글로나마 위로가 되고 싶다고.


내 지나온 인생으로. 그리고 마주하는 사소한 일상들로. 당신의 아픔을 응원하고 싶다고.

부디 잘 견뎌내 주었으면 좋겠다고.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살아보는 당신과 내가 되길.



그렇게, 당신에게도 봄이 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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