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anti Feb 09. 2019

나와 고기 사이, 딜레마

김한민 <아무튼, 비건> & 황윤 <사랑할까, 먹을까>

어린 시절에는 채식을 지향하는 엄마의 영향으로 제철에 나온 갖가지 나물과 배추김치뿐 아니라 총각김치, 갓김치 등 다양한 김치가 식탁 위에 올랐다. 일 년에 10번을 꼽을 정도로 고기에는 인색했지만 철마다 나오는 생선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내 식탁에 고기가 많아진 걸까? 2년간 방글라데시에서 생활하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기가 부족한 생활을 하고 돌아와서 고기에 대한 욕망이 생긴 것 같다. 이슬람 국가다 보니 돼지고기를 파는 곳이 거의 없었고, 다른 고기 또한 구입이 쉽지 않았다. 고기를 먹지 않아도 충분히 영양보충이 되었음에도 한국으로 돌아와 더 많은 고기를 먹기 위한 핑계를 만든 것 같기도 하다.


혼자 살게 되면서 집에서 해먹기보다는 밖에서 사 먹는 게 잦아졌다. 불금과 주말엔 닭고기를 뜯으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몸보신을 핑계로 저녁에는 항상 고기가 있었다. 집 주변에 식당만 봐도 돈가스, 돼지고기, 해장국 등 고기가 빠지는 메뉴가 없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식탁엔 고기가 점령하고 있었다.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나지!'라는 말은 마치 주문과 같았다. 구제역으로 인해 돼지와 소를 살처분한다는 뉴스를 보아도 안타깝게만 여겼지 내 삶과 연결하지는 않았다. 일상생활에서 손쉽게 접하는 고기가 생산되는 과정에 대해 알거나 고민해봐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 입으로 들어오는 고기에 대해서 이토록 무관심해도 되는 것인가? 생명에 대한 비윤리적인 과정을 거치고 생산된 고기를 먹고 나는 과연 건강해질 수 있을까?


미세먼지나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논의하기에 앞서 우리가 쉽게 접하는 작은 것 하나부터 더 윤리적으로 만들어나가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육류 소비는 더 이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와 생존의 문제로 고민하고 변화가 필요한 때인 것 같다.  



건강 자체가 목적이 될 순 없다. 건강은 더 나은 삶을 살고,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건강을 궁극적 목적으로 추구하다 보면 점점 소극적이고 이기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로 살게 되며, 역설적으로 건강을 잃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건강은 반드시 종합적이고 확장된 의미의 건강이어야 한다고.

p.36 / 김한민 <아무튼, 비건>


현재의 식량 공급 주도하에서는 잘 사는 나라들의 육류 소비 때문에 못 사는 나라들이 손해를 본다. 선진국은 저개발국의 경작지를 대규모로 매임하거나 장기로 무상 임차해 자국을 위한 사료 작물 경작지로 쓰면서 교묘하게 식량 주권을 침탈하고 토지를 수탈한다. 이렇게 대량 생산된 곡식을 저개발국 사람들이 직접 먹을 수 있으면 식량 문제도 상당 부분 해결된다.

p.107 / 김한민 <아무튼, 비건>


어느 날, 공장식 축산이라는 열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열차는 축산기업과 소비자의 두 바퀴로 굴러갔다. 달리는 열차에 연료를 부어준 것은 정부의 공장식 축산 지원이다. 동물복지, 국민건강,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축산의 양적 팽창에만 전념해온 정부,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이윤을 축적해온 축산기업, 고기를 싼값에 많이 먹고 싶어 하는 소비자의 욕망이 모여, 열차는 점점 더 빨리 점점 더 많은 동물을 실어 나른다. 브레이크 없는 열차는 어디로 치닫고 있을까? 그 열차에 동승한 우리는 어떻게 될까? 내가 보고 느낀 공장식 축산을 한마디로 정의 내리면, 그것은 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무정한, 혹은 비정한 산업이다.

황윤  <사랑할까, 먹을까>



관련 글 | 사랑할까, 먹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편식 독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