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고 숨 고르며, 기록으로 나를 잃지 않겠다는 다짐
잘못된 곳에 오래 머물면 사람은 조금씩 이상해진다. 처음에는 불편함을 느끼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불편이 일상이 되고, 결국엔 힘든 줄도 모른 채 버티는 게 습관이 된다. 그렇게 버티는 동안 설레는 일들은 하나둘 사라진다. 무뎌지고, 비어가고, 자신을 잃는다. 지난 10개월이 그랬다. 나는 아픈 줄도 모르고 견디며 살았다. 그게 가장 위험했다. 자신을 잃는 건, 무너지는 것보다 더 서서히 오는 파괴였으니까.
그 시간 동안 나는 온갖 감정을 겪었다. 지겹다가, 귀찮다가, 순간적으로 속이 시원했다가, 다시 힘들어지고, 그 와중에 잠깐 기쁘고, 또 행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기분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매일의 무게가 곧 노동이었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버팀이었다. 완벽한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하지만 불완전한 날들이 겹겹이 쌓여 결국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것이 내 기록이고, 내가 버틴 증거였다.
일을 시작 한 후 처음으로 한 달 이상 쉬는 시간을 갖는다. 사실은 단순한 휴식이라기보다는 다음 이민을 준비하는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도 숨을 고를 수 있는 여백이 있다. 지인들을 만나고, 집 안에 쌓인 물건들을 팔고, 버리고, 또 일부는 이고지고 떠날 준비를 한다. 미국에 처음 올 때는 짐 가방 두 개뿐이었다. 그때는 없던 수많은 물건이 어느새 생겼다. 그러나 집도, 차도 없는 생활은 오히려 정리를 쉽게 만든다. 쌓으며 살아온 세월이었다면, 이제는 비우며 떠나야 한다.
나는 앞으로 나를 다시 돌보려 한다. 그동안 나 이외의 것들로 채워졌던 공간을, 다시 나 자신으로 채워 넣고 싶다. 회사의 이름도, 타인의 시선도, 기록되지 않는 평가도 이제는 내려놓을 수 있다. 세상은 자랑거리를 남기라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오늘 하루를 살아내고, 버텨낸 흔적이 쌓여 내 삶의 기록이 될 뿐이다.
비우고 나면, 비로소 남는 게 있다. 그건 내가 다시 숨 쉴 수 있는 자리, 내가 잃지 않아야 할 내 목소리, 내 얼굴이다. 이제는 그걸 잃지 않기 위해, 조용히 회복하는 길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