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0일 수요일. 나는 읽음이 체험이 되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명절을 쇠러 형네 집으로 향하는 4호선 하행선에는 이런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장애인 휠체어 이동 관련 시위로 운행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급한 용무가 있으신 분들은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검색을 위해 핸드폰 앱을 켜니 급상승 검색어에는 역시 “4호선”이라는 검색어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장애인들이 서울역을 비롯한 몇몇 역에서 휠체어로 이동을 방해하고 있다.’ 는 기사였다. 정부가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을 위해 지하철 전역사에 엘리베이터 설치를 약속했지만 정작 예산안엔 관련 예산이 빠져있는 것을 규탄하기 위한 시위였다. 나는 도착해야하는 시간에 제약이 없었기에 조금은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상황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명절을 맞아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기 위해 양손 가득 짐을 싸든 시민들의 표정에 짜증이 깃들기 시작했다.
인터넷 기사의 댓글창을 열어보니 충격적이었다.
“배려와 호의와 권리의 구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음. 배려와 호의를 요구해야지 왜 권리를 요구함?”
“몸이 장애라고 뇌까지 장애가 되지 맙시다~ 장애가 훈장도 아니고 무슨 권리로 수많은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나요?”
“애자들이 애자짓거리 ㅋㅋ”
“앞으로 더 무시하고 편견가지고 하대해야지 ^^”
명절 전날 저녁, 전철을 지연시킨 탓에 발생하는 피해들에 대해 논리적으로 호소하는 글들이 있었지만 대다수는 장애인을 향한 무자비한 비난과 조롱이었다. 머리가 띵할 정도의 악성댓글의 향연. 얼마전 내가 장애인의 세계에 대한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내가 시간의 여유가 조금도 없었더라면, 내가 KTX의 표를 예매했더라면 나도 이같이 분노했을지도 모르겠구나- 란 생각에 나는 얼마간 창피했다.
<그냥, 사람>은 신뢰하는 지인의 추천으로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대뜸 사 읽었다. 몇 장 읽어보니 창피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졌다. 책은 노들장애인야학에서 교사로 활동했던 저자 홍은전의 장애인과 사회의 약자들에 관한 이야기었는데, 나는 제목을 보고 장애인과 관련된 일말의 그 무엇도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앎은 켜켜이 쌓여 든든한 정신적 기반이 되는가하면, 어떤 앎은 내가 여지껏 쌓아왔던 것들을 와르르 무너뜨린다. <그냥, 사람>은 내게 후자의 앎이다.
사고(事故) : 뜻밖에 일어나는 불행하거나 해로운 일. 누구나 뜻하지 않게 장애인이 될 수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장애인에 무지할 뿐더러 장애인과 그와 관련된 세계는 놀라울 정도로 음지에 있으며 거의 터부시된다. 작가는 동시대, 동일시간에 일어나는 일 중에서 사그라지는 것에 목소리를 부여한다. 불운과 비극의 상징으로 금기되고 거부되었던 몸들 편에서 투쟁한다. 소외된 자들의 편에서 기록한다. 물론 나의 세계관으로 오롯하게 공감할 수 없는 말들도 있지만, 감히 이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다.
장애인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던 것은-시설에서 사람들에게 요양과 돌봄을 받는다. 일상에 불편함이 많다.-라는 단편적인 사실들 정도다. 하지만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훨씬 고통스러운 세계가 있다. 그들은 고속버스를 이용하지 못하고, 고작 엘리베이터 버튼 높이에 목숨을 잃기도 한다. (내 생각에)시설에 수용되면 끝일 줄만 알았던 장애인의 삶은 일분일초가 불편함과 고통과의 사투였다.
당연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들도 니체를 읽을 줄 안다는 것, 대학에 가고 싶고, 연애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시설에서는 장애인이 니체를 읽고 싶어하는 것을, 대학에 가고 싶어하는 것을, 연애를 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핸드폰을 가지려는 마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탈시설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생경하다. 장애인이 시설을 벗어나 자신의 권리와 욕망을 누리는 모습이 생경하다는 것에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명절 전날의 시위가 옳다고 말할 순 없다. 어쨌건 그들은 많은 시민들의 불편과 피해를 야기했으니. 그럼에도 그들이 오롯하게 그르다고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내 곁에 많았으면 좋겠다. 대개는 삶의 경험 후에 시선이 뒤따른다. 이번만은 시선이 경험보다 선행해서 다행이다.
sns의 특성상 이런 긴 글은 잘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읽어준 내 친구들은 항상 느리고 답답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한 번쯤 생각하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2021.02.14
“세상의 변화는 ‘장애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 ‘장애인에게 닥쳐온 어떤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시작되며, 그것은 이 폭력적인 사회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살아가는 90퍼센트의 사람들이 비로소 ‘비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성찰할 때일 것이다.” p.125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아니 두 대쯤 얻어맞은 느낌이었는데, 한 대는 그녀가 강좌 하나를 듣기 위해 저녁 내내 오줌을 참는 일을 익숙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었고, 또 한 대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고려 사항 목록에서 무려 화장실을 뺀 자리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넣는다는 점이었다. 버튼의 높이 같은 것은 얼마나 사소한지, 나는 심장이 조금 아픈 느낌이었다.” p.146
“그게 얼마냐고 내가 묻자 야학 교사가 대답했다. ‘한 달에 500만 원이 넘죠.’ 나는 새삼 놀랐다. 그것은 늙은 어머니가 홀로 감당해온 노동의 무게이자 국가가 가족에게 떠맡긴 복지의 무게였다. 그 책임자들은 미안해하기는커녕 가족의 고통을 깎아내리며 말했다.” p.198
“이전의 나는 내가 우물 안 개구리이기 때문에 우물 밖 세상에 대해 배워야만 세상에 대해 아주 작은 소리로라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내가 만난 우물 밖 사람 역시 자기만의 우물 안에 갇힌 듯 보였고, 그게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의 세계를 몰랐으니 그도 나의 세계를 모르는 게 공평하다고. 그러니까 인간은 모두 각자의 우물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세상은 그런 우물들의 총합일 뿐이라고.” p.22
“글 속의 ‘나’는 현실의 나보다 더 섬세하고 더 진지하고 더 치열하다. 처음엔 그것이 가식적으로 느껴져 괴롭고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그것이 이 힘든 글쓰기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임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쓸 때 나는 타인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이고 더 자세히 보려고 애쓰고 작은 것이라도 깨닫기 위해 노력한다. 글을 쓸 때처럼 열심히 감동하고 반성할 때가 없고, 타인에게 힘이 되는 말 한마디를 고심할 때가 없다.” p.25
“세상을 아는 가장 안전한 방식은 독서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위험한 방식은 현장으로 들어가는 일. 박종필은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전자의 앎이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라면 박종필의 앎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일 것이다. 전자의 앎이 폭넓음을 지향한다면 박종필의 앎은 정확함을 지향할 것이다.” p.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