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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항아리 Sep 12. 2022

남다른 가치

집에 보라색 손잡이를 가진 과도, 오빠가 가져다준 길고 날카로운 과도, 독일 과도가 있다. 보라색 과도는 가볍고, 그립감이 좋으며, 과도를 간단히 썰기에 제격이다. 오빠가 가져다준 과도는 손에 과도를 잡을 때부터 무섭다. 서랍에 고이 모셔 놓았다. 독일 과도는 너무 무겁다. 그리고 손잡이와 칼날 부분이 이어지는 부분에 손이 걸칠 수 있어 쓰면서 칼에 베이지 않을까 겁이 나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보라색 과도만 사용했는데 오래 사용하다 보니 손잡이 부분이 낡고 점점 힘이 없어서 칼날이 빠질 기세가 역력해 보였다. 불안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과도를 사기 위해 일반 슈퍼마켓을 갔지만 기존에 집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과도와 비슷한 형태만이 있었다. 결국 빈손으로 집에 오는 일이 몇 번 있었다.     


추석 연휴 기간 재래시장에 갔다가 주방용품 파는 매장에 갔더니 원하는 과도가 있어 구매했다. 돌아오는 길, 삼태기, 소쿠리, 빗자루 등을 파는 시장 가판대를 발견했다. 시장 가판대 물건들이 낯설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도 종종 자다가 소변을 가리지 못해 엄마의 불호령으로 곡식 등의 쭉정이나 먼지를 걸러내는 키를 머리에 쓰고 바가지 하나를 들고 옆집에 소금을 얻으러 갔었다. 당시는 창피한지도 모르고 옆집 대문을 두드리며 아주머니가 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려 소금을 받아서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성장이 늦었다. 여섯 살 때까지도 말을 잘하지 못해 동네 오빠들의 놀림의 대상이었고, 한글도 늦게 깨쳤다. 성장도 느렸다. 지금의 키는 거의 중학교 3학년 때 컸던 키이다.      


그렇게 나는 쭉정이를 거르는 키에 대한 여러 추억이 있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 싸리나무를 키워 어느 정도 크면 바로 잘라 묶어서 말린 뒤 빗자루로 사용했고, 외할머니 집에는 나무 지게가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아궁이에 불을 땔 때 바닥에 편히 앉아 불을 지피라고 만들어 놓은 방석이며, 삼태기, 소쿠리 등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시장 가판대에서 파는 물건들이 낯설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외할아버지는 볏짚, 수수, 대나무 등의 재료로 멍석, 삼태기, 매판(맷방석), 빗자루 등을 손수 만드셨고, 손재주가 누구보다도 뛰어나셨다고 한다. 한번 만들기 시작하면 끝까지 만들어야 하는 외할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많은 물건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외할머니댁에 떡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수수로 만들어 놓은 빗자루로 외할머니댁 마당을 깨끗이 쓸었다.     


일반 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과도를 찾지 못해, 오랜만 들른 재래시장에서 나는 추억의 가판대를 만날 수 있었다. 그 가판대 중간에 여러 종류의 칼들이 있었다. 투박한 모양이 대장간에서 직접 만든 칼 같았다. 사장님에게 여쭸고, 대장간에서 만든 칼이라고 알려주셨다. 이미 과도를 주방용품점에서 산 까닭에 엄마는 나를 말렸지만 나는 기계로 대량으로 찍어낸 칼과 사람이 수없이 망치질한 대장간의 칼 하고는 다를 것 같다는 생각에 엄마의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원 부흥”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찍힌 과도를 구매했다. 만원의 값어치 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쇠를 녹이고, 담금질하고 모양을 잡기 위해 여러 번 망치질했을 대장장이의 흘린 땀에 비하면 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대장간에서 만든 칼을 만난 것은 행운이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주방용품점 칼의 포장은 뜯어내지도 않고 그대로 두고, 돌돌 신문에 말린 “남원 부흥” 대장간의 과도를 벗겨내고,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서 반으로 자르고 다시 반으로 잘랐다. 그립감이 사용했던 보라색보다 뛰어나다. 새로 구입한 칼이라서 그렇겠지만 과일도 잘 썰린다. 칼날의 길이 조금 짧아 보여 사용감이 좋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사용감이 우수하다. “남원 부흥”의 과도로 맛있는 과일을 잘 먹어야겠다. 우연히 필요한 상품인데 우수하기까지 한 상품을 만날 때는 행복하다. 예전에 인스턴트커피를 팔던 사람이라서 그런가.     


몇 년 전 아마존에서 한국의 호미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인기 있다는 뉴스를 봤었는데, 왜 나의 가슴이 뿌듯하며 자랑스러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학교 때까지도 봤던 대장간들이 지금은 많이 사라진 상황에서 앞으로 계속 그 명맥을 이어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사라지고 있는 대장간을 살리겠다고 대장간 시설을 현대화한 시킨 것은 물론 대장장이를 지원하고 있는 지역에 대한 방송을 본 적이 있는데 내 일처럼 기뻤다. “남원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에서 검색하니, 남자 하기도 힘든 대장간 일을 여자분이 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남편의 병환으로 대장간을 잇기 시작했던 “정길순” 명인이 이 세상 누구보다도 멋져 보였다. 인생의 역경을 얼마나 많이 넘기고 지금의 대장간을 지켜내고 있겠느냐는 생각에 가슴 벅찼다.      


독일 제품이 좋으리라 생각해 요리할 때 주로 쓰는 칼을 구매하면서 과도도 같이 구매했었다. 그런데 칼을 잘 갈지 않아서인지 독일 칼은 잘 썰리지 않았고, 과도는 너무 무겁고, 손잡이가 불편했다. 이제는 "남원 부흥"이라는 이름의 과도를 만났으니 조만간 바꿀 칼도 "남원 부흥"으로 바꿔야겠다. 기계로 찍어낸 칼과 수십 번의 망치질한 칼과 어떻게 견주겠는가. 사라진 것들에서 지켜낸 그들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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