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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항아리 Sep 27. 2022

건강한 삶

내가 잊고 있으면 한 번 씩 연락하는 친구가 있다. 그녀와 나는 학교 다닐 때 옥신각신했다. 의견이 맞지 않아 꽤 다퉜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서로 각자의 주장이 강해 자신의 주장을 접지 않고 티격태격했다. 학급신문을 만들기 위해 매일 싸우던 기억이 오롯이 남아 있다.      


그 친구가 반장 내가 부반장으로 있으면서 우리 반은 별난 반이고 대책이 없는 반이었다. 그러나 순수했던 반이었다. 떠들다가 교감 선생님에게 지적받고 벌 받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우리를 보는 담임 선생님은 개인사 때문에도 힘들었는데, 우리까지 더해 항상 힘겨워했다.      


담임은 우리가 교감 선생님에게 혼나는 것이 그렇게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이 꼭 자신의 책임인 듯 여기면서 우리 반 아이들에게 편지를 손으로 꾹꾹 눌러 다섯 장이나 쓰셨다. 그 다섯 장을 반 친구들 앞에서 그녀가 읽기 시작했었는데, 그 친구는 몇 줄도 읽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반 전체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장난기도 많고, 잔정이 많은 선생님이 진심을 담아 써 내려간 글에 아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 친구가 편지를 읽지 못하자 내가 건네받아 모조리 다 읽었다. 그렇게 정이 많았던, 마음이 따뜻했던 아이였는데 나는 그 친구와 도저히 합이 안 맞는다며 각을 세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친구가 잊을만하면 나에게 먼저 연락을 준다. 고맙다. 항상 먼저 챙겨주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한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안 돼 뇌종양으로 큰 수술을 받았다. 입원한 병원으로 병문안을 간 날, 수술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언어적 감각이 돌아오지 않아 대화조차 불가능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시간이 지나 잊고 지내다가 버스에서 우연히 그 친구를 봤는데 모른 척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병문안 때 친구의 가족에게서 들었던 말은 앞으로 5년을 살면 잘 사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수술한 나이로부터 24년을 살고 있으니 기적이다. 그러나 그 기적 속에는 계속된 합병증과 많은 병들과 함께 아픈 나날들을 보내왔다. 서로의 삶에 바빠 잊고 있을 때쯤 친구는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온다. 결혼했다고 전화 오고, 아이 낳았다고 전화 온다. 그리고 그간 아픈 것 괜찮았냐고 물어보면 정말 보통 사람들이 겪지 않는 병으로 고생했다며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한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마음고생했을지 상상이 간다.
 

고등학교 때 내게 말하지 않는 가슴 아픈 가족사까지 털어놓으면서 나는 그녀가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 사람인지 느껴졌다. 그래서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우린 서로 자신의 아픈 가족사를 털어놓지 못했다. 마흔이라는 나이를 훌쩍 넘기고, 어떤 인생이든 다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가슴 아픈 가족사를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을 만큼의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몇 년 만에 다시 전화 온 친구는 이젠 집에서도 걸어 다닐 수조차 없다고 했다. 오로지 침대에 누워만 있는다며 말한다.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 친구의 말에 가슴이 미어졌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얼마나 걷고 싶을까, 얼마나 밖으로 나가고 싶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전화 통화의 첫마디가 “이젠 내려놓고 싶어”라는 말이라 가슴이 철렁거렸다. ‘그녀가 걸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스무 살 때부터 온갖 큰 병으로 수술도 여러 차례 한 그녀에게 제발 건강한 몸을 주세요, 불우한 어린 시절로부터 탈출해 행복한 가정 속에서 사는 그녀가 더 오래오래 행복하게 가정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는 마음이 통화하는 내내 간절했다. 그리고 그런 친구에게 먼저 전화하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2014년인가 2015년인가 1월 대장암 말기로 수술했던 나의 지인과 며칠 전 전화 통화를 했다. 그의 나이 마흔 여섯이나 일곱 때였다. 나보다 열 살 많은 선배이다. 나는 그 선배를 괴롭혔다. 일 좀 알려달라며 괴롭히고 졸랐다. 보통은 선배가 괴롭히는데 오히려 후배가 선배를 괴롭혔다. 한번은 안 알려준 적이 있었는데, 내가 나의 화를 주체를 못해 전화하고 끊는 골탕을 먹이기도 했었다. 그런 나를 내치지 않았던 선배다. 같이 근무했던 회사를 나온 지 한참이 흘렀는데도 지금까지도 연락하는 사람이다.      


내 친구 목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중 하나이다. 나를 늘 걱정해주는 선배이다. 어떨 때는 내 가족보다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슬프다. 오랜만에 전화에 아무렇지 않게 횡격막 아래 종양 같아 보이는 게 있어 수술해야 한다고 말을 던지는 것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선배 때문에 슬펐다. 나는 슬픔을 삭히며 말했다. “나 시집갈 때까지는 아프지 말아야 한다고.” 늘 하는 농담을 싱겁게 했다.    

  

수술 날짜가 잡혔다고 다시 통화했을 때 문병하러 간다고 하니 보호자 1인밖에 안 된다면 오지 말란다. 혹은 간호 병동으로도 갈지 모르며 그때는 사모님도 오지 못한다며 오지 말란다. 2014년인가 2015년인가 수술할 당시에는 수술 잡으러 왔을 때도, 수술하고 난 뒤에도 몇 번 함께했다. 항암 할 때도 병원을 방문했다. 처음 뵈었던 사모님과도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그렇게 나에게는 소중한 선배였다. 그런 선배가 또다시 아프다니 슬프다. 건강하게 잘 이겨냈으면 좋겠다. 가까운 지인이 아프다는 소식에 나의 친구인 그녀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항상 그녀가 먼저 나에게 연락한다는 생각에 오늘 그녀에게 문득 카톡을 보냈다.      


내 곁에 있는 친구와 선배가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삶을 살아가길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바라는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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