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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항아리 Jul 25. 2021

약속시간보다 먼저

약속한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두른다. 정해진 시간보다 십 분 전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준비한다. 이런 루트는 친구와 약속하면 돌아가는 나의 시계였다. 시골에서 성장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더 약속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정해진 시간보다 미리 약속 장소에 나가려고 했다.     


시골살면서 가장 불편한 것이 대중교통이었다. 내가 사는 마을로 들어오는 버스는 하루에 고작 4대였다. 하루에 4대로 도시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일은 상당히 버겁고, 제약이 많았다. 결국 불편하더라도 좀 더 자주 운영되는 정류장으로 갔다.


어릴 적 그렇게 걷는 게 싫었다. 조금이라도 뭘 하려면 걸어 나가야만 할 수 있는 삶의 반경이 너무 싫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벗어날 수 없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없었다.      

   

많이 걷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에 사는 것도 싫었고, 도시에 비해 다양한 것을 누릴 수 없는 환경에 대한 서러움도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는 동네에 같은 또래의 동성 친구도 없어 마을이 싫었다. 같은 또래는 다 남자뿐이고, 마음껏 놀 동성 친구가 마을에 없었다. 나를 잘 놀리는 동네 남자아이들과는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잘 어울리지 않았다. 중학교 가면서부터는 더 서먹서먹해 말도 거의 섞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시골 마을을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이야 이따금 시골 생활이 그립지만, 중학교 때부터는 하루빨리 성인이 돼, 답답한 시골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답답한 마음에 종종 도시로 나가 친구들을 만나 아이쇼핑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놀기 위해 약속을 잡았다. 따분한 시골살이에 잠시 일탈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친구들과의 약속이 좋았다. 그래서 더더욱 약속을 잘 지키려 했다. 약속 시간을 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내가 상대방을 위해 할 수 있는 배려라고 생각했다. 나처럼 상대방도 한 번 도시로 나오기 위해, 많은 준비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니, 상대방의 시간이 낭비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 살짝 늦는 것을 제외하면 90% 이상은 십 분 전에 도착해 친구를 기다렸다.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해 친구를 기다리는 편인데, 간혹 만날 친구가 약속시간이 한참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으면, 한숨이 섞여 나오는 것은 물론 불만이 터져 나왔다.


늦는 친구는 매번 늦는 버릇이 있었다. 그럴 때면 ‘시간도 안 지키고 뭐 하는 거지’라며 입은 삐죽 나오고, 온갖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끝까지 친구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행복하지 않지만, 친구와의 만남은 즐거운 시간이라 막상 집에도 갈 수 없었다. 친구와의 즐거운 시간을 누리기 위해, 잠깐의 불편함은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에는 핸드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삐삐가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연락할 방법이라곤 유선전화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었다. 지금이야 늦으면 바로 연락해,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지만, 그때는 그저 기다리는 일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전혀 어떤 상황인지 도착하기까지 모르니, 답답하고, 화가 나고, 점점 입이 나온다. 그래서일까. 나는 나의 시간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시간도 소중하다고 여겨, 철두철미하게 지키려고 노력했다.     

      

근데 그런 내가 느슨해졌다. 대중교통이 편리하니 시간 개념이 무너졌다. 약속 시간이 임박해 도착하거나 5~10분 정도 늦은 경우가 종종 생긴다. 내가 거꾸로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이다. 벌써 그 시절을 잊어버렸다. 반성해야한다. 앞으로 누구와 약속을 잡으면, 그 옛날의 나를 떠올리며 더 잘 지켜야겠다. 내 시간이 소중한 만큼 상대방 시간도 소중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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