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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 영 May 05. 2020

시작, 그 벅찬 단어

어두운 터널도 결국은 끝이 있다는 사실..

4년 만이었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쳐도 내가 살던 집 방향으로는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었다. 그렇게 그곳은 한동안 내게 도려내고 싶은 썩은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곳을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버스가 정차하자 결연한 의지를 담은 두 발이 도장처럼 보도블록 위에 꽝꽝 찍혔다. 마치 출입 허가서에 내키지 않는 승인도장을 찍어준 것처럼.     


모든 것은 4년 전 그대로였다. 동네를 떠났던 그때도 늘어지도록 여유로운 늦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로수를 따라 불처럼 일어서던 철쭉의 향연도 기세를 한풀 꺾었다. 정수리 위에서 독기를 잔뜩 품은 한낮의 태양이 제법 푸르러진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존재감을 뽐냈다. 이제 곧 뜨거운 열기로 더 기승을 부릴 예정이라고 경고하는 듯했다.      


“이천 원.”     

존칭을 생략하고 끝을 부드럽게 올리는 구멍가게 아줌마의 말버릇도 여전했다. 삼십 대 중반인 내가 참 어려 보여 그러는구나 생각하며 좋아했던 그때의 나는 이제 그런 쓸데없는 생각 따윈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 마을 초입에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익숙하지만 또한 낯선 풍경들이 4년의 거리만큼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여자 혼자 살만한 작은 집을 보러 왔는데요.”     

흘끔 곁눈질로 손님을 스캔한 중개사는 ‘작은 집’이라는 키워드와 남루한 옷차림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는 중개수수료를 떠올렸을 것이다. 출입문에 손님이 서있다는 사실을 잊기라도 한 듯 상담전화는 끊길 줄 모르고 질질 늘어졌다. 그 동네에서 무언가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일종의 오기와 같은 감정이었을까. 엎어지고, 비척이고, 힘겹게 일어나 다시 쓰러지길 반복했던 곳. 십 분이면 끝과 끝을 오갈 수 있는 작은 동네. 4층 이하 빌라들이 열을 맞춰 빼곡히 들어선 대학가 구석구석에 내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길은 없었다. 신혼의 단꿈에 흠뻑 빠진 두 사람이 그 동네로 이끌리듯 스며들었고 끝내는 남겨진 한 사람이 상처를 채 보듬 지도 못한 채 도망자처럼 마을을 빠져나와야 했다. 일순간 어디론가 증발했다 4년 만에 같은 자리에 다시 선 사람처럼 흘러버린 시간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긴 보통 원룸도 전세는 1억부터 시작하는데, 몇 군데 보시겠어요?”     

통화를 끝낸 중개사가 슬리퍼를 그대로 끌고 책상 위에 무심하게 던져진 자동차 키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깜찍한 빨간색 모닝이 주정차로 비좁아진 마을 안 도로를 경쾌하게 비집고 나아간다.      

“주인이 급전이 좀 필요한지 여기가 시세보다 좀 저렴하게 나온 집이에요.”     

책상과 침대를 들이면 더 이상 무언가를 구상할 여분의 공간도 없는 작은 원룸으로 안내되었다. 그렇게 출입문과 창문의 위치만 다를 뿐 복제한 듯 똑같은 모양을 한 몇 개의 원룸 앞에 빨간색 모닝은 바쁘게 발 도장을 찍어댄다.       

“아까 마을을 돌다 보니 저기 21번지 건물이 꽤 적당해 보이던데…… 혹시 그 건물엔 빈 집이 있을까요?” 21번지 건물엔 원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중개사는 두 배쯤 부풀어질 수수료를 생각했는지 한층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모닝에 키를 꽂았다.     


“여기가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데 터가 좋아 그런지 다들 잘 돼서 나갔지요 아마?”      

중개사가 안내한 집은 다름 아닌 그곳이었다. 21번지, 203호. 처절하게 남겨졌던 곳,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곳. 함구한 듯 굳게 닫힌 철문이 열리면 나의 지난 모든 흔적들이 그대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착각에 정신이 잠시 아찔해졌다.      

“침실 창문을 열면 바로 산이 보여요. 여기 뷰는 진짜 끝내주지.”     

중개사는 의기양양하게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래, 창밖의 저 나무들을 보고 이 집을 선택했었지.’ 함께 미소를 나누던 그때 그 사람은 지금쯤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4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또다시 그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스스로가 조금은 가엾게 느껴졌다. 가구가 모두 빠진 휑한 집은 4년 전 그곳을 떠날 때 그대로였다. 침실에 혼자 앉아 잠이 오지 않는 숱한 밤들을 지새웠고 다시 거실로 나와 넘어가지 않는 까끌한 밥술을 혼자 꾸역꾸역 입속으로 밀어 넣곤 했다. 이제는 과거로부터 무던해진 내 앞에 한없이 여리고 병약한 4년 전의 내가 집안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새 시작하려면 이 정도 집에서 해야죠. 대학가라 원룸은 너무 좁고 시끄럽잖아요.”        

시작.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어 이 동네를 다시 찾았다. 내가 아팠던 곳, 내가 쓰러졌던 곳, 상처가 아물면 꼭 다시 돌아오리라 다짐했었다. 완전한 치유를 끝내진 못했지만 이 정도면 다시 일어설 수 있겠다 싶은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잠시 쉼표를 찍고 떠난 그곳에서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온전한 마침표를 끝내 찍지 못했기 때문에. 도피가 아닌 종료였음을 당당히 세상에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이 집으로 계약하죠.”     

영업 전략이 먹혔다 생각했는지 중개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천장에서, 장판에서, 벽지에서 스며 나오는 지난 기억의 환영들이 마음속을 질서 없이 휘젓고 다녔다. 거실 한 켠 구석진 공간, 작은 테이블이 놓여있던 곳에 이끌리듯 시선이 가 닿았다. ‘왜 난데! 대체 왜 나만!’ 손등에 생채기가 나도록 때리고 또 때리고, 억울한 마음이 풀릴 때까지 주먹으로 쳐댄 그곳 벽지엔 아직도 미세한 혈흔의 얼룩이 남아있었다. 눈물처럼 피가 흐르던 그날의 상처 따윈 더 이상 손등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말끔히 아문 단정한 손을 얼룩에 가만히 가져다댄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좋은 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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