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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 영 Jul 10. 2020

딛고 일어서면 실패에도 가치가 생긴다.

숱한 실패가 인생의 농도 짙은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머릿속 모든 공간을 깨끗이 비우고 ‘실패’라는 한 단어를 가운데 놓는다.    

  

‘실패’     


마흔 해를 살아오면서 특별히 기억에 각인된 실패의 경험들을 떠올려본다. 가능한 한 처참하고 아픈 것으로. 아마도 그런 경험들이 독자들의 마음을 비교적 쉽게 건드릴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일까. 며칠 동안 같은 생각을 반복해보지만 이렇다 할 무언가가 생각나질 않는다.      


‘왜 일까? 내 삶이 그토록 굴곡 없이 평탄했던 것인가?’     


단언하건대 확실히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실패의 경험에서 한 발짝 더 깊이 들어가 본 이 질문엔 제법 명확한 답이 금세 생각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에겐 그만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실패. 그것을 특별히 아파하고 아쉬워하기엔 실패를 직면하고 통각처럼 받아들이는 몸 어딘가가 무뎌진 탓이었다. ‘그래서 뭐?!’ 무소의 뿔처럼 앞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것. 그것이 나를 실패의 충격으로부터 습관적으로 멀어지게 한 학습된 방법이었다.      


수상자 명단엔 내 이름이 없었다. 혹시나 놓치진 않았는지 처음부터 다시 꼼꼼히 살폈지만 역시나였다. 작가 타이틀을 얻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냐 마는 고배를 마실 때마다 호기롭게 도전하던 용기는 한 뼘씩 키를 줄였다. 간절히 원하던 꿈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는 날이 내게도 찾아올까? 쓰린 속을 달래는 것은 따뜻한 위로가 아닌 밑도 끝도 없는 한 줄기 희망이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다시 책상에 앉는다. 과거를 가득 채우고 있는 실패의 경험들을 책상 위에 주욱 늘어놓고 글의 소재를 찾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던 일, 견디지 못하고 직장을 뛰쳐나온 일, 그리고 번번이 소설 공모전 당선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일 등 실패의 꼬리표를 단 사건들이 소재로 선택되길 갈망하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당시 그 일들에 부딪혔을 땐 정신이 아찔할 만큼 충격으로 전율했지만 지나고 보니 모두 좋은 글감으로 변해있었다. 그것에 손을 뻗어 오늘도 키보드를 두드리고 이야기를 만든다. 또 하나의 실패로 기억될지 모를 그 일에 난 참 열심히도 정성을 쏟는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각오한 건 5년 전 일이다. ‘결혼에 실패한 여자’라는 낙인으로 휘청거리던 나를 다시 바로 세운 건 글이었다. 상처 받고 지친 마음을 매일같이 블로그에 진솔하게 써 내려갔다. 당시의 나는 사람과의 직접적인 대면이 너무도 두려웠다. 그래서인지 가까운 지인들과의 관계마저 모두 끊고 자꾸만 내 안으로 도망쳤다. 블로그 창을 열어놓고 아픈 속내를 끄적이는 것이 세상과 유일하게 소통하는 방법이었다. 굳이 내 아픈 고백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온라인 창을 통해 매일같이 이어지는 담담하고 진솔한 고백들은 마우스를 쥔 사람들의 손을 점점 멈춰서게 만들었다.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는 공감으로 힘을 얻고 마음이 넉넉한 누군가는 따뜻한 격려의 말을 건넸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실패의 아픔도 잘 이겨내고 나면 무언가의 든든한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을. 글을 쓸 때 그 시련의 시간 속에 습관적으로 먼저 생각이 머무는 것은 아마도 그 실패의 경험이 지금의 나에겐 잘 익은 글감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꿨을 때 예상보다 아주 긴, 생각보다 더 아픈 고통을 감내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영원히 이루지 못할 꿈으로 남을지 모른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엄청난 일을 끌어안고 빛나는 꿈을 향해 나아가겠다고 다짐했던 5년 전의 그 사람, 바로 나였다. 살아오며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순간들이 그리 녹록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크고 작은 실패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기보다 제법 덤덤할 수 있었던 것은. 가야 할 길이 험난한 가시덤불이란 걸 각오한 자에게는 고작 가시에 찔린 작은 핏방울이 고행을 중단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언젠가 이룰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 꿈을 향한 열정이 그 모든 실패의 고통 위에 사람을 바로 세운다. 숱한 실패를 이겨낸 결연한 눈동자를 가진 사람을.     


“영이 님의 문장은 너무 길어 뜻이 모호해져요. 사건들의 인과관계도 어색하고…” 

함께 글을 쓰는 모임에서도 혹평을 받고 돌아오는 날들. 하루만큼 쌓인 적응의 굳은살이 고통을 느끼는 몸 어딘가에 차곡히 쌓여간다. 그리고 난 조금 더 단단해진다. 실패의 고통도 잘 이겨내면 나름의 가치가 생긴다는 진리를 되뇌면서. 그리고 또다시 과거의 기억 속에 깨지고 일그러진 것들을 골라내 이야기를 붙여 생명을 불어넣는다. 실패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사회가 정한 그 기준에 지금 부합하지 못했다는 사실일 뿐 내 인생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때문에 좌절할 이유는 없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할지, 얼마나 혹독한 평가의 말들을 견뎌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다. 남들 눈엔 비록 어리석어 보여도 우직한 바보가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의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숱한 실패가 내게 가르쳐준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나아가면 꿈의 성취를 이루거나 혹여 그렇지 않아도 쌓인 내공으로 다른 가치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자에게 남겨지는 것은 포기를 합리화할 궁색함이었다. 그렇게는 되고 싶지 않았다. 편안한 현실보다 꿈을 향한 열정의 크기가 압도적으로 컸기 때문에 후자를 선택할 경우의 수는 크게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실패의 두려움도 열정 앞에선 늘 무색하게 힘을 잃고 사라진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명성으로 판가름되는 타이틀이 아닌 이 행위 자체를 기준으로 한다면 지금 내 삶은 실패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실패라 불리는 경험들을 딛고 또 견뎌나갈 것이다. 내 글에 더 큰 생명력과 영향력을 실어주기 위해서. 은둔하던 시절 매일같이 블로그에 담담하게 써 내려간 기록들처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솔한 응원을 전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이겨낸다면 실패는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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