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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 영 Aug 09. 2020

자존심 그리고 자존감

두 성질의 마음, 참 닮아있다.

“영이 씨, 그렇게 끝까지 자존심 세울 거야? 회사 방침이 그렇다는데 어떡하겠어. 경위서 한 장이면 끝날 일을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결국 난 사직서를 던졌다. 이유는 ‘부당함에 대한 저항’ 쯤으로 정리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를 처리하던 중 시스템 오류로 인해 마치 내가 실수를 저지른 듯 보이는 결과가 생겨버렸다. 시간을 두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고 항변했지만 계약직 말단사원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조직의 가장 말초기관에서 꼼지락거리는 사원으로서가 아닌, 나라는 존재 자체를 무시하며 깔아뭉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존심을 훅 긁고 지나간 커다랗고 예민한 스크래치. 난 그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모두들 그 자존심 앞에 ‘쓸데없는’이란 수식어를 붙였다.

‘그놈의 쓸데없는 자존심’

허물없이 가까운 지인들은 나를 가볍게 타박하고 싶을 때 면전에서 이 표현을 썼고, 친하지 않은 사람들은 뒤에서 줄곧 그 표현으로 나를 수식하며 수군거렸다. ‘내가 그들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래도 쓸데없는 이란 수식어를 붙였을까?’ 그렇게 또 배알이 꼴리는 난 정말 대책 없이 자존심만 강한 사람일지 모른다.    


그 쓸데없는 자존심은 늘 나를 고독하게 했다.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내가 우습게 보이나?’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은 빠르게 손절해버렸다. ‘내가 좀 더 잘난 사람이었어도 그들이 나를 그렇게 대했을까?’ 하는 생각에 뛰쳐나온 직장도 여러 곳이었다. 가진 것이 없기에, 아직은 영향력이 없기에 그렇게라도 나를 보호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험난한 사회에서 치이고 휩쓸려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위협을 느끼곤 했었다. 하지만 그런 삶의 방식이 이어질수록 난 점점 더 고립되었다. 늘 성취를 이루지 못한 빈손이었고 사람들은 내 곁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사랑의 영역에서도 자존심이 앞선 행동 패턴은 예외 없이 발휘되었다. 만남 초기엔 작은 다툼에도 늘 팽하고 돌아서는 여자의 도도한 모습이 남자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매력 포인트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거듭되는 자존심 싸움은 점점 상대를 지치게 한다.    


“너는 어쩜 그렇게 한 번을 그냥 넘어가지 않아? 한 번을 먼저 다가오지 않냐고. 날 사랑하기는 하니?”     


다수의 커플들이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그 흔적도 희미해질 사소한 이유로 우리는 늘 툭탁댔다. 작은 불씨는 생각보다 큰 불로 번졌고 급기야는 얼마간 냉전의 시기를 보낼 만큼 일은 커지곤 했다. 냉전을 종식시키는 화해의 손은 항상 그가 먼저 내밀었다. 싸움이 크던 작던, 누구의 잘못으로 싸움이 시작됐든 그가 내미는 손을 잡을 듯 말 듯 난 늘 그렇게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렸다. 그가 불평하며 지쳐갔던 지점도 바로 그곳이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그 패턴에 익숙해진 것일까. 조금만 내려놓자, 조금 더 유해지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상황에 맞닥뜨리면 욱하는 성질머리 끝에 자존심이 와락 뛰쳐나와 맹렬히 포효하곤 했다. 그런 내게 지친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말없이 내 곁을 떠났고 난 얄팍한 자존심과 함께 다시 고독해졌다.      


문득 자존심의 정의가 궁금해졌다.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스스로 품위를 지키는 마음’ 국어사전은 자존심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꽤 괜찮은 뜻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자존심은 늘 자존감이란 유사한 단어 아래 열등한 취급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어사전은 자존감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 얼핏 비슷하게 다가오는 두 단어의 정의를 나란히 놓고 비교를 한다. 자존심에 없는 자존감의 정의 중 일부분은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자존감에 없는 자존심의 정의는 무엇인가. 바로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나름 진지한 분석에 들어갔다. 그동안 나를 고독하게 한 그 애매한 성격의 감정은 무엇이었는지. 자존심이라는 결론을 내리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억울한 생각이 들 때마다 상대방을 향해 급 발진하듯 내지른 것은 너무도 사랑하는 나 자신을 위한 합리적인 충돌은 분명 아니었다. 행여 상처 받을까,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선공격의 한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늘 보호막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것, 그래서 어느덧 내 캐릭터의 일부가 된 그것은 자존심이 맞았다. 쓸데없는 자존심이 강한 철없는 영이. 그런 인식은 나 자신과 지인들에게 점점 굳어져 가장 ‘영이’ 다운 것을 드러내는 고유명사처럼 자리를 잡아갔다.     


그와의 이별이 제법 아프지 않을 때쯤 지인의 추천으로 결혼정보회사를 이용하게 됐다. “회원님 인상이 참 좋으셔서 제가 좋은 분 소개해 드릴게요. 이 분은 자산이 50억이고 서울에 집도 있어요.” 가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플매니저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그들은 한결같이 상대의 재산내역을 알려주기에 급급했다. 어느 누구도 내게 이상형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내 평생 저런 돈을 만져볼 수나 있을까 싶을 만큼 재력이 탄탄한 이성들이 소개됐다. 어깨가 움츠러들도록 위축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번만큼은 자존심을 좀 내려놓기로 한다. 정확히 말하면 내면에 깊게 숨었던 속물근성이 그 뻣뻣한 자존심을 누를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돈 많은 배우자를 만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는 것이 내 자존심을 더욱 굳건히 지킬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에 쉽게 자리를 내준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부려온 자존심은 나의 존재를 정의할만한 특성이 아니었단 결론이 내려진다. 옅은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눈을 감기로 했다.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공기업에 다니는 그의 연봉은 1억이 넘었다. 서울 중심부에 30평이 넘는 고층아파트도 소유하고 있었다. 잘빠진 그의 승용차 조수석에 앉아있을 때면 덩달아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자존심을 버리자. 그러면 초라한 내 10평짜리 원룸과 푼돈을 아끼려던 궁상스런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음 어딘가에서 자꾸 이런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 얄팍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온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진실하다 믿은 사랑이 남겨준 것이라곤 아픔과 상처뿐이었다. 자존심을 버리면 된다. 그러면 그의 부가 내 자존감을 향상시켜 줄 것이다.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 품위를 지키고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 부유한 나는 비로소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연애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다툼은 부유한 그고 해서 피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연애에 있어서도 항상 갑의 위치에 있던 그와 자존심이 강한 나. 사소한 다툼은 기세가 무섭게 큰 불로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게 급기야 이런 말을 던지고 말았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자격지심이야?”       


그 한마디에 제정신이 돌아왔다. 눈을 가린 채 어디를 향해 가고 있던 것인가. 나다운 자존심을 버린 건 사랑이 아닌 그의 조건 때문이란 걸, 그 길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적어도 진정한 행복은 아닐 것이라는 걸 명확하게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그를 만나면서 내팽겨 쳤던 자존심의 옷을 다시 주워 입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잘 사세요. 그 잘난 조건들 어필하면서.”     



그날의 행동은 그저 지질한 자존심에서 비롯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껏 후회가 없는 걸 보면 양심을 거스르지 않는 잘한 행동임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나의 그 ‘쓸데없는’ 자존심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쩌면 자존심은 자기를 존중하는 자존감의 한 표현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자 하는 자존심. 그 마음의 기저에는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마음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남에게 굽혀도 품위를 지킬 수 있지만 때론 굽히지 않아야 할 때도 찾아온다. 그러니 자존심이 무조건 자존감으로부터 열등한 위치에 있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그동안 그래 온 것처럼 다시 호기롭게 높은 자존심을 뽐내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형태는 이전과 조금 달라졌다. 때로는 남에게 굽힐 줄도 알며 스스로 품위를 지키는 것이 결코 사회적 위치나 부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 쓸데없는 자존심에 지쳐 떠난 그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그가 보고 싶었다. 작은 회사에 다니고 소형차를 타는 그가 오랫동안 참 그리웠나 보다. 그는 알까? 그에게 다시 설레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토록 힘겨워했던 내 자존심이 가르쳐준 교훈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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