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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 영 Feb 16. 2020

이별한 그대의 행복을 비는 이유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진실로 사랑했으니..

"잠깐만 내려와 봐.. 출근하기 전에 잠깐 얼굴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퇴근 무렵 문득 회사 앞으로 찾아온 그.. 

학원강사로 일했던 그는 퇴근 인파에 역행해 출근을 하곤 했다. 


결혼을 전제로 동거를 하고 있던 당시..

출근하며 오전에도 얼굴을 마주했고, 늦은 밤 그가 퇴근하면 또 얼굴을 마주 할 텐데.. 굳이 회사 앞으로 불쑥 찾아온 그의 급작스런 방문이 의아했다.


"아침에 맨손으로 나가던 니 찬 손이 계속 맘에 걸려서.."


불쑥 내민 그의 손엔 여성용 가죽장갑이 들려있었다. 장갑을 건네 준 그는 출근을 해야 한다며 급하게 등을 돌려 퇴근 인파 속으로 빠르게 모습을 감추며 사라져 갔다.


덜렁거리는 성격에 무언가를 잘 흘리고 다녔던 나는 자주 장갑을 잃어버렸다. 버스에 올라 벗어둔 장갑이 무릎에 올려져 있다는 사실을 잊고 그대로 내려 여러 번 사용하던 장갑을 잃어버리곤 했었다. 그런 이유로 한파가 몰아닥쳤던 몇 년 전 그 한겨울 아침, 나는 하얗게 드러난 찬 손을 떨며 출근길에 올랐었다. 


'저 사람이 그토록 섬세했었나?'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며 내 손에 옮겨 온 장갑을 나도 몰래 어루만졌다.  껴보지 않아도 충분한 온기가 느껴졌던 뜻밖의 선물.. 

무려 15년이나 지난 그날 단 10분 간의 기억.. 하나의 단상으로 남아 영구적 기억 저장소에 확실히 각인이 되었다. 


남편이란 존재로 내 곁에 머물다 다시 자리를 비우고 떠나간 그..

참 많이도 다퉜고, 죽일 듯 서로를 증오했고, 마음의 뿌리까지 저릿하도록 연민으로 신음하다 결국은 서로의 손을 놓았다. 


'나'라는 나무를 지탱하던 굵직한 지지대를 뽑아버린 듯, 갑작스러운 그의 부재로 속수무책 흔들리고 방황하던 날들이 지속되었다. 파헤쳐진 흙 사이로 뿌리가 드러나고 점점 더 메말라가는 나무와 같았던 그때의 나.. 그를 참 많이도 원망했었다. 너도 똑같이 아팠으면.. 너의 삶도 비참한 나의 현실처럼 시궁창으로 처박히길..



때론 인간에게 내린 슬픈 비극이 되지만 또 한편 감사한 선물이기도 한 망각의 힘.. 그 어마어마한 분노의 덩어리도 망각이란 주머니 안에서는 세월의 작은 칼날에 의해 잘게 부서지고 또 바스러졌다. 이따금씩 상처를 감싸 안겠다 다가오는 잠시간의 사랑들로 분노의 기억들은 가속을 붙여 흔적을 지워갔다.  


그를 떠올리면 순간적인 무딘 통증이 이따금씩 가슴 어딘가에서 반짝하고 지나가지만 지금 내게 그의 존재는 더 이상 내 가슴에 어떤 파도의 일렁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감사한 그 망각의 힘 때문에.. 그런 날 문득 생각해본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니 어떤 존재였는지.. 그는 무엇이었는지.. 날 떠난 지금은 행복한지..


수많은 생각을 돌고 돌아 결국 하나의 결론이 선명하게 남는다. 

장갑을 건네러 회사 앞에 찾아온 그날의 그는 세상 무엇보다 그때의 내가 소중했던 나의 진실한 사랑이었음을.. 내게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해 안타까워했고, 혹여 내가 떠날까 전전긍긍했던 그때 그의 간절함은 거짓이 아닌 순수한 마음이었음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깨끗이 뒤돌아 다른 기억들을 오염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


나조차 내 마음 밑바닥을 선명히 들여다볼 수 없는, 인간이란 존재가 그토록 복잡한 하나의 작은 우주인데 나를 스친 그 모든 사람들을 단 몇 마디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 사랑, 약속, 영원 등의 숭고한 단어들을 한결같이 유지하기에 인간은 매우 나약하고 간사한 존재임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 불완전함 때문에 우리는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시는 하지 않겠다던 빌어먹을 사랑에 입문하고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의 과거가 어찌 됐든 내 앞에서 사랑을 말하는 현재의 그는 진실하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 다시 서로를 놓을지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떠올림조차 금지되었던 이전 사랑의 기억들을 꺼내 본다. 수없이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고 상처 내던 기억들이 아프지만 서로를 보듬고 함께 울었던 진실한 기억의 순간들도 기억의 저편에서 이쪽으로 아련히 고개를 내밀었다.    


'됐다, 이 정도면.. 한동안 이 기억들로 외롭지 않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마흔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들어 올려 본 기억의 상자는 제법 묵직했다. 실패라 기억된 아픈 사랑들과 떠난 존재들에 대한 조각조각의 추억과 그리움.. 신경 써 챙길 필요도 없이 고스란히 다시 담기는 진실한 마음과 예쁜 추억들 뒤로 구분할 수 없이 어지럽게 뒤엉킨 감정의 파편들이 정리의 손길을 기다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고 싶지 않아서, 또다시 상처 받을까 미루고 미뤘던 그 일에 가만히 손을 가져가 본다. 그때의 나는 왜 그렇게 감정적이었을까.. 필요 이상 그에게 모진 상처를 줄 일은 아니었는데.. 하는 마음의 이야기와 함께..


마흔을 불혹이라 했던가.. 

난 여전히 많은 것들에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지만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20대의 나보다 여유가 생겼고 30대의 나보다 침착해졌다. 이제 다시 사랑이 온다면.. 자존심처럼 굳건했던 나의 무언가를 허물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게 되었다. 나이 마흔에야 비로소.. 그래서 지난날의 기억들을 차분히 정리한다. 서로에게 진실했던 그 순간들의 기쁨을 다시 사랑을 기다리는 동력으로 삼고, 눈물을 흘렸던 순간들을 반성하면서.. 그렇게 또 망각의 힘으로 내게 다가올 한 사람을 기다린다.


내가 행복하고 싶은 만큼, 

그때의 나와 너무도 아픈 상처를 나눠가졌던 그때의 당신들이

이제는 충분히 행복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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