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철없는 영 May 17. 2020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유사한 균열을 만들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거든 이전 상처를 먼저 치유할 것

"손 내밀어 봐요."

이 사람 뭐야 싶은 표정으로 내민 손바닥에 따뜻한 꿀물이 건네 졌다. 

"돌아가는 길에 그냥 내 커피 사다가 S 씨 내일 숙취로 고생하지 말라구요."


그는 제법 외진 동네에 사는 나를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길을 거슬러 다시 되돌아와 꿀물을 건넸다. 이미 새벽 한 시가 가까운 시간. 주차돼있는 그의 차로 돌아가는 데도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내가 그 친구의 어떤 점에 반했는지 알아요?"

여기서 그 친구라 함은 그의 엑스 와이프를 칭하는 말이었다. 그도 나처럼 안타깝게 다시 혼자가 된 돌싱이었다. 돌싱 대 돌싱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적극적이고 로맨틱한 그의 행동.. 거기까진 참 좋았는데 그 분위기를 와장창 깨는 엑스 와이프 얘기라니.. 이 자식은 뭘 하자는 걸까 싶은 복잡한 감정이 달콤한 느낌들을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게 이따금씩 엑스 와이프 얘기를 자주 입에 올렸다.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아, 그 친구도 그랬었는데..'이런 식의 아련한 표현들.. 


바다가 보이는 횟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날 그에게 물었다. 왜 헤어지게 된 거냐고. 엑스 와이프가 외도를 했단다. 아이를 유산한 직후에 그랬다는데 아마도 그 허한 감정 때문이었을 거라고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보호막을 입혔다. 

"정말 많이 사랑한 거 같은데 용서를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그러려고 했는데.. 그 친구가 이혼을 원했어요. 그리곤 내게 비굴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내가 그 말을 왜 들어야 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네요."

창문 쪽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이야기를 하던 그의 눈은 젖어있었다. 아직도 그녀가 많이 그리운 모양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의 슬픈 눈 속에서 지난날의 내가 보였다. 그래서 나도 함께 따라 울었다. 하지만 난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었다. 지난 상처는 살갗에 남았지만 더 이상 나의 통각을 자극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상처가 아픈 모양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사랑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웃고, 여유시간들을 모조리 상대에게 쏟아부으며 그렇게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갔다. 이미 연인과 다를 바 없이 서로의 생활을 공유했지만 그는 결정적으로 우리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다. 연인도, 친구도, 지인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 어쩌면 그는 내게 완벽히 반하지 않았을지도, 적당히 가볍게 즐기는 관계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너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는데, 난 참 상처가 많아. 너에게 늘 그 친구의 좋은 점만 얘기했었지? 야밤에 다른 남자랑 모텔에 있는 아내를 잡아온 적도 있었어."

생각해보니 꿀물을 건네준 첫 만남의 날도 그는 내게 '무섭다'는 말을 했었다. 내가 너무 좋은데 두렵다고.. 


한동안 관계 정립의 문제를 두고 조금 실랑이를 벌이던 우리는 결국 이별했다. 아니, 내가 보낸 일방적인 통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당신은 참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그렇게 그냥 상처 속에서 계속 살아요."

모진 말을 쏟아버리고 돌아선 나도 어쩌면 내가 받을 상처가 두려웠던 모양이다. 혹시나 그의 맘이 진심이 아니라면, 그저 가벼운 만남의 상대로 나를 만나고 있다면.. 내 생각과의 온도차를 극복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난 온수에 살아가는 동물인데 그의 맘이 냉수란 걸 알아차리는 날, 그 차가운 물속에서 죽어갈 내 모습이 몹시도 두려웠던 것 같다. 


그와의 관계는 '사랑'이란 단어를 꺼내기 전에 그렇게 깔끔히 종료되었다. 이별로 인해 마음을 추스르고 할 그런 무언가도 없지만 생각해본다. 그는 내게 무엇을 생각하게 하려고 다가온 인연이었을까.. 이전 인연으로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채 다른 사람에게 무작정 기대려고 하는 그를 보면서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아마 나 또한 저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곁에 있는 사람, 혹은 내게 다가오려는 사람들을 밀쳐내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반성들.. 생각해보면 이혼으로 인해 받은 충격과 상처들이 제대로 봉합되고 아문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하지만 치유 이전에도 인연을 맺었고 그들에게 상처를 줬다. 연인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 위로 내 이전 트라우마가 무섭게 드리워졌다. 그 트라우마의 무게까지 상대에게 책임을 물었던 것도 같다. 백지같이 하얀 첫 만남에서부터 그가 두려움을 느꼈던 것처럼..


아물지 않은 상처는 새로운 관계에서도 결국 유사한 균열을 만든다. 


이별한 그가 빨리 이전 인연의 상처들을 털어냈으면 좋겠다. 내게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좋으니 상처를 털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전 06화 거지 언니, 잘 지내고 계세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