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EBS국제다큐영화제
<306 할리우드>

철없는 영이의 영화 파먹기

by 철없는 영

제15회 EBS국제다큐영화제 그 둘째 날 <306 할리우드>를 보고


306 할리우드에선 무슨 일이?


여름이면 의식을 치르듯 떠나는 여행.

엘란과 조나단 남매는 어릴 적부터 이 시기에 줄곧 할머니 댁을 찾았다. 마을의 모든 시간이 도시의 그것보다 조금은 느리게 흐르는 듯한 마을 306 할리우드 거리에서 할머니는 남편과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남은 생을 혼자 사셨다.


할머니 댁을 찾을 때면 엘란과 조나단은 할머니를 인터뷰했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나요?"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나요?"

카메라 영상이 10년쯤 쌓였을 때 할머니는 남매 곁을 떠났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남매의 어머니는 죄스런 맘에 힘겨워하다 기억으로부터 도망치자는 결론을 낸다. 어머니의 집을 처분하고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

집을 처분하기까지 11개월이란 시간을 두고 남매는 남겨진 할머니의 어수선한 흔적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깔끔하게 정리된 물건들과 함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추슬러
그 집을 떠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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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려 할수록 선명해지는 기억


때 묻은 흔적들을 닦아내고 정리하면서 남매는 오히려 할머니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된다.

할머니의 침실, 할머니의 부엌, 패션 디자이너였던 할머니의 옷가지들까지..

그것들은 더 이상 생활을 위한 도구가 아닌, 할머니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들이 된다. 10년 간 할머니의 이야기를 빼곡히 담은 영상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기록이었다.


고인의 물건을 정리하는 막막함을 덜어내기 위해 남매는 물리학자, 큐레이터, 의류 전문가, 기록 보관인 등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해 정리에 박차를 가하지만 집을 내놓을 시간이 빠르게 다가오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정리나 생각의 결론을 내지 못한다.

정리해야 할 추억이 한 페이지 펼쳐지면 그때의 기억을 소환해 머무를 뿐 서둘러 급하게 정리란 것이 이어지지 않았다.

물건 정리를 통해 할머니를 이해할 단서들이 늘어갈수록 남매에게 할머니의 기억은 또렷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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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끝났다고 해서 그 삶을 정의할 수 있을까?


남겨진 흔적들을 통해 남매는 할머니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녀도 눈부시게 아름답고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 자신의 아이들에게 한없이 따뜻한 엄마였다는 것. 그런 아들이 떠나고 할머니 역시 아들의 남겨진 흔적과 더불어 살아왔다는 것.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침표를 찍어버린 문장처럼 변화의 여지가 없는 삶.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을 이렇다 할 말들과 정의로 결론지을 수 있을까?

남매는 남겨진 흔적들을 통해 할머니를 이해할 뿐이다. 고고학자들이 남겨진 유물로 인간 존재의 근거를 찾아 유추하듯이 할머니의 삶은 남매의 노력 끝에서 재현될 뿐이다. 거창하게 '발굴'이란 이름을 붙여가며 들인 노력에 비해 그들이 찾아낸 것들은 형편없이 작은 것들이었다.

어떠한 추측으로도 할머니의 삶 그 자체를 정확하게 알아내거나 정의할 수는 없다는 것.

그들의 탐험은 점점 미궁 속에 방향을 잃어갔다.


우리의 현재는 떠난 그들의 흔적이 아닐지..


집을 처분하기로 한 11개월이 다 지났지만 가족은 그 집에 계속 머무르기로 한다. 집에 묻은 흔적들을 털고 떠나기엔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

그러나 그들은 11개월 할머니의 흔적들과 함께 하며 이전보다 더 많이 그를 이해하고 추억하게 되었을 것이다. 집을 처분하지 못하는 이유도 아마 이것 때문이지 않을까..


마음의 고통을 씻기 위해 고인을 잊고 그 기억과 무관하게 살아가려는 노력.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남겨진 물건이 아닌, 남은 사람의 가슴에 심은 고인의 기억은 그와 오래도록 삶을 함께 한다.

그리움의 흔적은 반성으로, 때론 후회로, 때론 다짐으로 남은 이의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떠난 이들이 남긴 생각과 말, 그들의 성취는 우리가 사는 오늘을 만들었다.

기억과 추모를 특별한 시기에만 언급할 필요 없이, 과거라 불리는 그들의 날들은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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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는 다른 차원에서 시공간을 공유하는지도 모른다.


집을 처분하기까지 11개월이란 시간의 여유를 둔 것은 세상을 떠난 영혼이 최적의 평온함을 느끼던 자신의 집에서 11개월간 머무른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11개월은 단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곁에 있는 영혼의 존재를 최소한 존중한다는 의미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집을 정리하겠다고 나선 남매의 의도는 처음부터 '삭제'가 아닌 '불러오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 흔적들을 따라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닐까..


남매의 정리를 돕기 위해 등장한 전문가들 중 물리학자는 이런 말을 쏟아 놓았다. 분자와 원자, 모든 것은 그것으로 설명될 뿐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다, 영혼의 세계는 그것이 배열되고 흐르는 규칙과 시간 등이 우리들의 그것과 다를 뿐이라고..

우리가 사는 차원에선 영혼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렇게 각자 다른 차원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이 최소한의 11개월을 기다린 그 믿음처럼.. 또한 떠나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기로 한 지금처럼..

기억하는 한 존재한다는 진부한 표현들도 덩달아 떠올랐다.




상징적인 화면들과 일반적이지 않은 구성으로 다소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았지만, 어쨌든 예술이란 감상하는 사람 개인의 몫이니까..

다큐영화 <306 할리우드>는 단지 유년시절과 조부모의 추억을 회상하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8월 26일(일) 18:15 EBS 1 TV에서 시청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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