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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 영 Nov 05. 2018

다시 앤이 되어 살아보기

이제야 겨우 당찬 앤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왜 어른도 없는 집에 함부로 들어와서 소란이냐구요! 당장 나가요!"


귀를 찌르는 8살 꼬마의 외침은 허공을 휘 떠도는 먼지 한 톨도 위협하지 못했다. 두 주먹이 짓이겨지도록 꽉 쥔 꼬마를 향해 옆집 남자가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이게 어른한테 함부로 까불어!"

"어른? 당신이 지금 우리에게 하는 행동은 어른스럽나요?!"


답답했다. 난 지금 어린애가 아닌데.. 꼬마는 생각했다. 하지만 논리적인 문장을 입으로 내뱉는 아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가늘고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

꼬마가 미간에 힘을 주고 조금 더 힘 있게 비난의 말을 던지던 그 순간, 남자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한낮에 귀신이라도 본 듯 공포감으로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의 그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선다.


어..  나도 느낌이 이상해.. 분노를 느껴 외칠 때마다 꼬마의 몸이 자라났다. 세상이 일순간 정지되고 시간은 오로지 꼬마를 집어삼켜 빠르게 흐르는듯했다. 옆집 남자와 눈높이가 맞게 다리가 자랐고, 분노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눈동자의 에너지도 강렬해졌다. 여자의 분홍빛 두 뺨이 꼬마의 그것처럼 탐스레 윤을 냈지만 카랑카랑하게 전달력이 분명한 목소리는 더 이상 먼지 하나 위협하지 못했던 꼬마의 그것이 아니었다. 아이는 일순간 분노의 빨강머리 앤으로 변신을 완료했다.


아연실색 혼이 나간 듯 정지 버튼이 눌린 남자에게 다 자란 꼬마가 성큼 다가선다.


"어른들도 안 계신 빈집에 들어와 6살짜리 꼬마 머리를 벽에 밀치는 게 어른이 할 짓이냐고요!"


옆집 남자는 눈앞에서 벌어진 이 기묘한 일을 아직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예 빠져버렸나 싶게 아래로 쳐진 턱을 다물지도 못하고 다 자란 꼬마, 아니 여자가 다가오는 만큼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평온한 주말 오후, 옆집 남자는 부모님이 모두 장사 나가고 없는 꼬마들 집에 들이닥쳐 나른한 그날 오후의 정적을 단번에 파괴시켰다. 슬리퍼를 신은 채 집 안으로 성큼 들어와 다짜고짜 6살 꼬마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네가 우리 현우 얼굴 저렇게 만들었어?!"


겁에 질린 꼬마는 손에 쥐여 구겨진 종이처럼 힘없이 흔들릴 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 사달이 난 것은 불과 몇 분 전의 일이었다. 옆집 꼬마를 귀여워하던 6살 꼬마는 엄마가 냉장고 위에 올려두고 간 라면박스를 꺼내 옆집 아이와 생라면을 나누어 먹고 싶었다. 바득바득 의자를 기어 올라가 닿지도 않는 손을 힘껏 뻗어 박스를 계속해서 공격해댔다. 박스는 집요한 공격에 저항이라도 하듯 조금씩 위치를 바꿀 뿐 좀처럼 꼬마가 뻗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독한 꼬마의 끈기.. 결국 박스는 백기 투항하듯 힘없이 냉장고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퍽..!


그 순간 의자 밑에서 박스를 함께 올려다보던 옆집 아이가 급작스런 울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박스가 떨어지며 아이의 얼굴을 스친 것이다. 놀란 꼬마 남매는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그대로 얼어붙었고 옆집 아이는 집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1분 뒤, 사자처럼 포효하며 꼬마들 집으로 들이닥친 옆집 남자. 아이들에겐 상황을 설명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우악스러운 손에 맥없이 휘둘리던 아이. 남자는 혼이 빠진 아이를 세워두고 다 자라지 않은 그 작은 머리를 벽으로 힘껏 밀쳤다. 꽝! 꽝!

두 살 터울의 누이도 고작 8살이었다. 6살 꼬마처럼 두려움에 오들 거리며 억울함의 눈물을 떨구는 일 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 책에서 본 당찬 빨강머리 앤은 그저 환상에 불과했던 너무나도 여렸던 그때.. 다 자란 성인이 되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오래 묵은 체증처럼 가슴 한 구석을 꽉 막아서고 있었다.


"사과하세요! 제 동생에게 잘못했다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란 말이에요!"


그때의 꼬마가 당찬 빨강머리 앤이었다면 이렇게 얘기했을까? 여자의 분노는 여전히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무섭게 치켜뜬 두 눈의 에너지가 남자의 목을 조를 듯 강렬히 빛나고 있었다.

뭐, 뭐야.. 당신.. 여전히 혼이 모두 돌아오지 않은 듯했지만 남자는 상황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신 아들이 귀여워 같이 간식을 나눠먹고 싶던 아이예요. 고의로 아이를 때린 것도 아니고, 우연히 벌어진 실수라고요. 그런데 지금 당신, 신발도 벗지 않고 남의 집에 들어와 힘없는 애한테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어요. 그러고도 당신 어른이라고 할 수 있어요!"


흔들리던 남자의 눈동자가 차츰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 아들이.. 남자도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복잡한 감정을 담은 표정으로 여자를 응시했다. 그러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감정의 줄은 이내 슬며시 느슨해졌다. 그 줄을 먼저 놓은 건 옆집 남자였다.


"... 아저씨가 미안하다. 꼬마야.."


남자는 체념한 듯 투박한 한 마디를 내뱉고 집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갔다.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렁그렁 눈물 고인 눈으로 남매를 응시하던 여자는 아이들에게 다가섰다. 아이들 가까이 두 무릎을 살며시 굽히고 앉아 따뜻한 시선으로 남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남자의 손에 휘둘렸던 6살 꼬마를 살포시 품에 안았다. 괜찮아.. 이제 내가 지켜줄 거니까.. 여자는 옆에서 서럽게 흐느끼는 8살 누이, 어린 날의 자신을 대면했다. 따스한 온기가 가득한 손으로 아이의 얼굴에 얼룩진 눈물 자국을 부드럽게 지웠다. 울지 마.. 네 잘못이 아니야..


이제 겨우 앤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가난이란 성장환경이 빨강머리처럼 타인과 다른 낙인으로 찍혔던 어린 시절.. 앤을 동경했지만, 너무도 어리고 여렸던 꼬마는 현실에서 결코 앤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성인이 되도록 가슴 한구석에 상처로 남은 기억들.. 가슴속 꼬마를 여전히 성장시키지 못했던 그날의 아픈 그림자들을 이제라도 하나씩 지워가고 싶다. 다 자랐지만, 다시 한번 앤이 되어.. 이젠 더 이상 빨강머리가 부끄럽지 않은 당찬 앤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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