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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 영 May 21. 2019

알약 하나,

우울증과 제법 오래 살아온 철없는 영이의 체험기

#우울증 환자? 그냥 조금 예민한 나일뿐..


"숙제를 하나 내드리겠습니다."

"??"

"아침 약을 지어드릴 테니 두 시간 전에 약을 먹고 만원 지하철을 타세요."

"네?"

"일주일치 지어드립니다. 숙제입니다."


사실, 우울증 약을 몇 달째 복용 중입니다. 

자해와 자살시도 이런 극단적인 위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래된 우울증으로 수면 패턴이 엉망이 되었고,

약간의 공황장애가 있거든요.


그동안은 불안과 수면에 관한 약만 일주일씩 받아가곤 했는데,

최근 실연을 한 이유 때문인지 극으로 달했던 스트레스가 가라앉으며 약을 먹기 이전처럼 

사람들이 너무 두렵고, 이상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지인들과는 괜찮은데 이런 증상이 극대화되는 경우는 바로 사람이 꽉 들어찬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심해집니다. 그렇다고 공황장애처럼 사람이 많을 때 심장박동이 격하게 빨라지거나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거나 하는 정도는 아닙니다. 말을 늘어놓을수록 점점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나.. 모르는 이들이 제게 닿는 것이 견딜 수가 없고 그들과 좁은 공간에서 숨을 나누는 것이 매우 불편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온 신경이 곤두선채 참을성 한계의 99%를 유지하고 있으니 그 스트레스가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죠. 


그래서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 교통수단에 사람이 가득하면 정해진 도착시간에 늦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 한산할 때까지 승차를 포기하거나 두세 배로 넘게 시간이 걸리지만 비교적 한산하게 갈 수 있는 다른 길을 택하곤 합니다.



"선생님, 보통 다 이렇지 않나요? 이게 약을 먹어야 할 병은 아닌 것 같은데.." 

"보통 사람들은 쾌적하지 않다 정도로 생각하고 참고 갈 수 있는데 그 정도는 일종의 증상이에요. 임소공포증"


그러나 저는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오히려 이제 서서히 약을 끊어야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적응돼서 효과를 느끼지 못하면 좀 더 센 용량으로 늘어나는 우울증 약..

이 약에 저는 이미 너무나 많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 약이 없으면 잠을 엉망으로 자 다음날 컨디션이 최악이니 말입니다. 


병원을 다니던 초기에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선생님, 약을 최소한 얼마나 먹어야 하나요?"

"정해진 기간은 없어요. 증상이 있으면 약을 먹고, 약을 먹지 않으면 그냥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거죠."

"그럼 좋아지거나, 그래서 그만 먹어야 하는 날이 오는.. 그런 건 아니란 말인가요?"
"뭐.. 그런 셈이죠. 약이 있는데 굳이 먹지 않고 참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우울증 약은 고혈압 약이나 비타민처럼 그냥 평생을 친구처럼 옆에 두고 먹어야 하는 약이 될 수 있단 말입니다. 증상이 어떤 이유로 호전되기 전에는 말이죠.


하루에 두세 번 약봉지에 의존해 살아나가야 하는 삶이 아무리 생각해도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약을 먹고 증상이 괜찮나를 실험해봐야 할 만큼 난 사회에 부적응하며 살고 있지도 않습니다.

생각해보니 약을 먹기 이전의 나..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지요. 

조금 힘들었지만 우울함을 인정하면 그만인 것 같습니다. 

나는 환자가 아니에요. 그냥 조금 예민한 나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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