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철없는 영 May 30. 2019

알약 둘,

우울증과 제법 오래 살아온 철없는 영이의 체험기

#굳이 약을 끊게 된 이유에 대해 물으신다면..


급성 위염으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사경을 헤매다 돌아왔습니다.

술이나 커피를 과하게 하지도,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그렇게 사달이 난 이유를 의사들은 대체로 스트레스에서 찾곤 하죠. 


스트레스..

살아가는 것이 스트레스 그 자체인데 그것을 안 받고 사는 것이 말이 되지 않지만.. 조금 살만해진 뒤 원인을 곰곰이 생각하니 아마 우울증 약을 중단한 것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우울증 약을 중단한 지 일주일째부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엉망이 된 수면 패턴으로 약을 먹는 이유가 가장 컸는데, 약을 끊은 그날부터 잠을 이룰 수 없었죠.

분명 졸음으로 눈에 피로가 느껴져 잠자리에 들었는데 불만 끄면 멀뚱멀뚱.. 몇 시간째 딴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하죠. 가까스로 잠에 들면 이젠 꿈 퍼레이드가 펼쳐집니다. 기분 좋지 않은 이상한 느낌의 흉몽들.. 그나마도 작은 소음이라도 들리면 불연속적인 흉몽들은 끊기고 이어지기를 반복하며 밤새 제 영혼을 피폐하게 뒤흔들어댑니다. 


다시 불을 켜고 앉아 세상에 아무도 없는 듯한 살인적인 적막을 느끼며 구원을 기다리듯 아침을 기다리는 날들도 있었죠. 그런 식으로 며칠을 보내고 나면 급격한 면역력 저하로 주변의 온갖 자질구레한 질병이 한꺼번에 지친 육신으로 달려들죠. 그야말로 피곤한 날들의 악순환은 끊이지 않게 됩니다.



그럴 거면 차리리 계속 약을 먹어.. 굳이 왜 그걸 참아야 돼?


약을 끊은 이유..


첫째, 치료가 아닌 일시 진정제를 평생 동안 의지하며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약을 복용해보기로 한 것은 우울증도 일정한 시간을 노력하고 약을 복용하면 치료가 가능한 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만난 정신과 전문의 말은 조금 달랐죠. 증상이 계속 호전되기보다 약을 중단하면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버리는.. 그래서 진단을 내리고 대략적인 복용기간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까지 복용기간은 사실상 한정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알약 몇 개가 내 두뇌회로를 이리저리 움직여 수면욕, 성욕, 식욕부터 시작해 감정을 컨트롤한다는 것과 그것에 기약 없는 긴 시간을 저당 잡혀야 한다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둘째, 약이 가져올 수 있는 여러 가지 역효과들이 걱정됐습니다.

몇 달 전 TV에서 우울증을 다룬 다큐를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등장한 정신과 전문의는 항우울제는 전혀 부작용이 없는 안전한 약이라고 강조했죠. 이 부분은 의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으로서 그저 우려 섞인 걱정일 뿐인지 모르겠습니다. 


우울증 약은 처방전을 받아 외부 약국에서 약을 사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직접 약을 줍니다. 약봉지와 함께 약의 이름과 기능이 기재된 뭐.. 그런 종이도 한 장 없습니다. 처음엔 대체 내가 무슨 약을 먹는 건지 궁금해 간호사에게 약의 이름을 일일이 물어보곤 했죠. 하지만 일주일씩 증상에 따라 약이 바뀌니 그것도 귀찮아 점점 소홀하게 되죠. 집에 돌아와 가끔씩 처방받은 약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는 정도였죠. 


그러다 우연히 한알의 약에 대해 기재된 부작용을 보고 손이 멈칫하더군요. 그 약을 먹은 산모가 구순구개열 태아를 출산했다는 부작용이 공신력 있는 포털사이트에 고스란히 올라가 있더군요. 앞서 말한 부작용 없는 항우울제의 범위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약들이 정신과에서 환자들에게 처방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점점 늦어지고 있지만 아직 임신 가능성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여성으로서 그것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써 놓고 보니 자칫 '우울증 약은 위험해요, 드시지 마세요'라는 글처럼 보일 수 있겠다 싶어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저는 우울증 약의 복용에 대해 타인에게 이렇다 할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제가 경험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죠. 증상이 너무 심하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줄 정도의 환자라면 약을 복용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의사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의학적 지식에 대해 맞다 틀리다를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약을 먹으며 느꼈던 제 생각과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조금 가시고 대중교통으로 3시간 남짓 떨어진 부모님 댁에 가서 며칠을 보냈습니다. 한가한 낮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지하철 속 주위를 둘러싼 불특정 다수의 타인들이 불편했죠. 옆자리에 앉아서 계속 가방을 들쑤시는 아저씨의 팔꿈치는 내내 제 몸에 닿았고, 맞은편에 앉아 신발을 벗고 있는 아줌마의 맨발에서 냄새가 올라오는 듯 불쾌하게 느껴져 가는 길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약을 끊은 탓인지.. 몸이 아픈 탓인지.. 원래부터 퍼스널 공간을 침해당하거나 매너 없는 행동을 참을 수 없는 성격이긴 하지만 어쩐지 너무 견딜 수가 없어 며칠 후 돌아오는 날은 장시간을 기다려 버스를 이용했습니다. 물론 자리는 몸이 부딪히지 않을 만한 마른 체형의 여성 옆자리를 택했죠.


어떤 날은 스스로가 정신병인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상황을 좋아라 할 사람들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저 '아, 짜증 나.. 아, 불쾌해..'가 조금 더 크게 느껴지는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족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작가의 이전글 알약 하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