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영이의 책 파먹기
죽음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축복 중 최고의 축복이다
아직도 많은 이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당장 누군가에게 정해진 죽음의 기일이 선고되면 인생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무너진 듯 그동안 쌓아온 그 모든 것을 걸고 죽음으로부터 격렬히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좋은 죽음이라니.. 이 책은 과연 무슨 비밀을 담고 있는 걸까?
<DEATH 좋은 죽음 나쁜 죽음>은 우리에게 암암리에 금기시된, 혹은 영원히 풀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 대해 과감한 도전장을 내밀고 다양한 실험들을 감행한다.
2014년 11월, EBS 다큐프라임에서 3부작으로 나누어 방송된 이 신비의 다큐는 2019년 1월, 다시 한번 책으로 우리 곁에 찾아왔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지만 아직 젊거나 건강에 특별한 이상이 없는 사람들은 마치 그 문제가 자신의 인생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 살아간다.
그러나 어떠한 계기로 죽음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사치나 자신이 속한 그룹에 대한 맹신, 성적 충동의 감소 등 동물성을 거부하고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행동들을 한단다.
공포관리이론이라고 하는 이것은 상업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사람들을 조정하기 위해 이따금씩 사용되기도 하는 비밀이다.
솔직히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론과 생각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 책에 완전히 매료되기 시작한 건, 2부, '비탐 애테르남: 사후세계와 의식'이었다.
이 장에서는 잠시 사후세계를 경험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이들의 공통점을 토대로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노력이 이어진다.
심장박동과 뇌 운동이 완전히 정지되고 이후의 어떤 세계를 경험하고 다시 현재로 돌아온 것을 근사체험이라고 한다. 이런 근사체험은 대체로 공통된 특징이 나타난다. 어디론가 어두운 터널로 빨려 들 듯 흘러가 눈부신 빛이 비치는 따사롭고 황홀한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 누군가는 먼저 사별한 그리운 이들을 만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지점에서는 죽은 자신의 몸체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신비하지만 결코 믿을 수 없는 공통적인 체험을 하기도 한다.
의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대체로 뇌 산소 결핍에 의한 현상이거나 뇌 활동에 의한 착각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일부에선 영혼, 즉 몸을 떠나 자신의 죽음을 보는 그 '의식'이 뇌 기능의 산물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 부분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근사체험을 '의식'이라는 열쇠로 풀어내는 것, 그리고 의식이 뇌와 관련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기존에는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주장이었다.
수술을 할 때 마취제가 의식을 없앨 수 있듯이 우리 몸에서 의식을 떼어내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사람들이 근사체험을 하는 지점은 뇌기능이 모두 정지한 이후에 일어난다는 점에 집중한다.
책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의식을 양자물리학의 영역으로 까지 끌고 간다.
이 부분은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양자역학의 특징은 빛이 두 곳에 존재할 수 있고, 관찰자에 의해 양자의 상태가 변한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경계로 구분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또 다른 의식의 세계로 연결된다는 것도 이 양자역학으로는 해석이 가능하다.
양자물리학은 수학으로는 매우 잘 기술될 수 있으나 인간의 뇌가 양자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경험적으로 이해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섣불리 단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의식의 분리, 근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죽음이 더 이상 공포스럽지 않기 때문에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져 현생의 모든 것에 집착을 버리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한다고 한다. 근사체험을 통해 본 사후세계는 두려워할 것이 아닌, 이 생보다 훨씬 좋은 황홀경을 경험하게 한단다.
때문에 어떤 이는 근사체험을 경험한 후 자살을 다시 시도하거나 현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해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고도 한다.
결론적으로 모든 이가 두려워하는 죽음을 일상적인 삶의 과정으로, 따뜻하게 인지하게 되면 사람들은 조금 더 이타적이 되고, 문화를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해지게 된다고 한다. 이를 잘 활용하면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기심과 양극화를 조금은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 죽음에도 기술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마지막 3장, '아르스 모리엔디: 죽음의 기술'에서 설명하고 있다.
대체로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의 소망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자신의 집에서 마지막을 보내길 원하고 있으나 실제로 우리는 대체로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안타깝지만 사회적 분위기가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지 오래다.
불안하고 두려운 격리된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각 나라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죽음을 일상의 끝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
죽음 알림 주간, 데스 카페 등 어린이들도 막연한 그 죽음의 공포를 인생의 한 부분으로 알게 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죽음을 인지한 후로 삶이 조금 더 풍요로워지고 욕심을 내려놓는 결과가 정말 이 책의 내용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어린 시절부터 그런 교육을 시행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도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도..
죽음에 대한 개인의 생각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어떠한 죽음이 가치가 있는 지를 정의하는 것 까지도..
어떠한 죽음을 좋다, 혹은 가치 있다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 담기 꺼려하는 그 죽음을 도마 위에 꺼내 놓고 요리조리 칼질하면 현재 우리의 삶이 조금 더 맛있고 풍성해지는 멋진 요리가 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DEATH 좋은 죽음 나쁜 죽음>
인생을 돌아보고 싶은 이들에게, 또는 삶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