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프롤레타리아를 거부한 철없는 영의 성장 이야기
세상을 살다 보면 정말 딱 죽고 싶은 순간이 종종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대로 딱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땐 대체로 이성이 마비된 엉망진창의 본능 덩어리인 경우가 많죠.
눈물, 콧물이 범벅된 꾀죄죄한 몰골로 자신을 최대한 괴롭히다가 이러다 정말 죽겠다 싶은 순간, 지친 얼굴로 주위를 돌아다봅니다. 혹시나 내게 손 내밀어 줄 누군가가 곁에 있는가..
그런 사람이 없는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해집니다.
휴대전화 목록을 끝까지 뒤져도, 혹시나 빠진 사람이 있나 하여 다시 한번 되돌아보았는데도 어느 곳 하나 맘 놓고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아, 나 인생 헛살았구나
슬픔에 더해진 절망은 조금 더 위험해지기 시작합니다. '정말 끝내버릴까?' 쓸데없는 용기가 어디선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와 벼랑으로 조금씩 조금씩 무책임한 발자국을 찍어갑니다. 자칫 잘못하면 천 길 낭떠러지.. 그럼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죠.
그리고 세상은 당신을 아무렇게나 '비겁자'로 기억합니다. 그의 눈물이 나 고통 따위를 오랫동안 공감해 주지 않죠. 이내 곧 그 기억마저도 사라지고 당신은 이 세상에서 모래알 한 점보다 못한 無가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버티고 살아가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세상살이가 왜 이리 만만치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유서'가 영어로 무엇인지 문득 그 단어가 궁금해졌습니다.
will??
영어를 그다지 잘하지 못하는 분들도 이 단어는 잘 알고 있죠.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는 조동사 will.
그것이 '유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자살을 거꾸로 해봐요. 살자가 되니까.." 이 유사한 말은 세계 어디에나 있는 듯한 느낌이었죠.
'자살의 거꾸로 살자'의 영어 버전을 찾은 느낌이랄까요?
누군가의 죽고 싶다는 말은 어쩌면 '나 좀 살려줘'로 일단 해석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정말 죽고 싶은 사람은 실제로 죽음을 잘 입밖에 내지 않은 채 다시 살아날 확률이 가장 낮은 방법으로 확실히 이승과의 연을 끊어버리거든요.
누군가 삶이 괴로워 포기하고 싶다 말한다면 미미하고 불완전한 당신의 경험으로 그에게 섣불리 충고하려 하지 마세요. 당신 나름의 심사숙고한 성의의 한마디가 그의 귀엔 쉽게 비난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 한마디면 유서를 남기려던 그의 will이 의지의 will로 돌아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