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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 영 Aug 23. 2019

알약 열셋,

우울증과 제법 오래 살아온 철없는 영이의 체험기

#어쩌면.. 그보다 더 깊은 심연에서 시작된 일


"OO 씨는 꼬리가 참 긴~ 사람 같아요. 상황이나 사람과 이별을 해도 아주 오랫동안 그것을 생각하고 곱씹고 정리하는데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람.."


주 1회씩 진행되는 심리상담이 일 년을 넘어가며 선생님과 저는 점점 친구가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아픈 내담자와 그것을 양지로 끌어내어 따뜻한 햇빛을 만나게 해주는 상담자가 아닌, 그저 같이 나이를 먹어가고 비슷하게 아팠던 경험을 떠올리며 서로에게 힘이 되는.. 그런 친구 말입니다.


기계적으로 나란 사람에 대해 한 주씩 오픈하고 그 시간을 넘어 나란 '인간'에 대해서까지 드러내 보일 기회들이 쌓이면서 선생님은 점점 더 나라는 인간을 정확히 보고 공감과 연민을 느끼는 듯했습니다.


맞습니다. 선생님의 그 말이.. 저는 아주 어릴 적부터 감성이 위태롭도록 예민한 아이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에드가 엘런 포를 알게 되었습니다. 소년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담은 <에너벨 리>, 성우 배한성의 목소리로 낭독되는 그 시를 9살 나이에 처음 접하고 문학의 아름다움에, 이성 간의 사랑에 대해 어렴풋한 감성의 얼굴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때 카세트 테이프로 듣던 시낭송의 배경음악, 성우의 목소리 톤까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에 선한 걸 보면 확실히 그 시점에 내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놀라운 일이죠. 고작 9살 나이에..


감성이 예민하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에 있어서는 '상처 받기 쉬운'과 같은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보통은 같은 상황을 겪어도 그냥 털고 말아 버릴 일을 '왜 그 사람은 그래야만 했을까,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등등 상황을 털지 못하고 들여다보고 또다시 보고.. 그러다 보면 상황이 혹은 상대가 의도하지 않았던 부분에서까지 나 스스로 상처를 받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선생님이 말한 대로 꼬리가 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자주 겪는 딜레마죠.


천성적으로 그렇게 감성이 예민한 아이 앞에서 부모님은 사흘이 멀다 하고 싸웠습니다. 아버지는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며 소리를 질러댔고 어머니는 늘 울었습니다. 친구도 없는 어머니는 늘 그 작은 아이를 붙잡고 아버지 험담을 늘어놓았죠. 어릴 적부터 청소년기가 끝나는 동안, 그 긴 시간을 시달려야 했습니다. 반발심에 충분히 어긋나 잘못된 길을 갈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전 이미 <에너벨 리>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감성이 발달한 존재라는 걸 스스로 인식했기 때문이죠. 

초등학교 2학년 아이는 부모를 이해했습니다. 당신들도 오죽하면 그러시겠어요.. 나까지 비뚤어지면 당신 삶에 낙이라곤 없겠죠.. 대신 전 부모님과 정 반대로 살아야겠다 다짐했습니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예술을 사랑하고, 공부를 하고.. 집안에서 아무도 행하지 않고 가르쳐주지도 않은 일을 하며 아이는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어른을 가장했던 연약한 아이의 속마음은 그대로 모두 상처가 되었습니다.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아주 차곡하게 상처로 쌓여 마음 한 구석이 곪아가고 있다는 것을 서른이 되어서야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지 못했던 반항과 방황.. 전 그것을 마흔이 가까운 지금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잠이 오지 않는 밤엔 유튜브로 여러 강연자들의 이야기들을 만납니다.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강연들이 많지만 저는 주로 김창옥 교수의 강연을 위주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어릴 적 화목하지 못했던 가정환경으로 인한 결핍, 그 슬픈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슬퍼 보이는 눈 속에서 비슷한 무언가가 느껴졌나 봅니다. 그는 일방적인 강연 방법보다는 청중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들에게 필요한 해법들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강연을 이끌어갑니다. 인생의 크고 작은 일로 삶의 어떤 시점에 멈춰있는 사람들.. 명확히 이유를 알 수 없어 더욱 힘들어하는 그들에게 김창옥 교수는 자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어떠셨어요?"


놀랍게도 질문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에서 현재의 문제들의 씨앗을 발견하게 됩니다. 너무나 오래 잊고 산 일인데.. 이젠 다 잊었다 생각한 일인데.. 우리가 작은 존재였을 때 우리를 덮쳐왔던 그 그림자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크고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몇 년 전 그 사건들 때문에 난 이렇게 망가지고 힘들어진 것 같아, 원래 난 이런 사람이 아닌데.. 라며 모든 마음의 짐을 미뤄버리려 하니 그 이전에도 주기적으로 우울함과 만나던 나를 직면하게 됩니다. 그건 내 어린 시절 주야장천 불화의 그림자를 드리운 부모님 때문이야..라고 생각하니 <에너벨 리>를 마음으로 이해하던 내 예민한 감수성을 만나게 됩니다. 우울증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들을 습득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환경이나 상황이 우울증을 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유전이나 기질적인 요인으로도 우울증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요. 급작스레 찾아오기보다는 만성으로 인생에 따라붙는 우울의 경우가 주로 이에 해당하는 것 같아요. 저의 경우에도 기질적인 원인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들은 '나약함'이라고 함부로 부르기 좋은 이 우울감 때문에 오히려 저는 글을 쓰고 자유를 만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남들이 두 번 멈춰 서지 않은 곳에 서서 보고 또 들여다보고.. 그렇게 꼬리가 긴 관찰은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인간관계가 너무 부담스럽고 힘들어 조직을 떠나 있는 저를 보면서 사람들은 '자유'를 떠올립니다. 그것을 의도하고 이탈한 것은 아닌데, 자유는 어느새 저의 대표 이미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조금만 유명해지면 좋겠다.. 늘 생각하지만 누구나 꿈은 갖고 사는 거니까.. 저는 그 꿈을 품고 작지만 비교적 만족스러운 제 삶을 살아갑니다. 9살 나이에 에드가 앨런 포를 만났던 그 감성이 준 선물입니다. 아직 완결되지 않은.. 비교적 희망적인 열린 결말의..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당신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열린 사람일지 모릅니다. 


상처로 얼룩진 마음 끝에 결과물처럼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섬세하고 예민해서 아픔을 여러 번 되새김질한 것이지요. 그때 왜 상황은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가.. 그것이 나의 최선이었는가..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삶이나 사고의 패턴을 굳이 타인의 그것처럼 바꿔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다름'의 문제일 뿐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직면하고 조용히 바라보면 우울이 주는 인생의 선물도 꽤나 많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것도 에너지라면 삶을 조각할 수 있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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