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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 영 Sep 02. 2019

알약 열넷,

우울증과 제법 오래 살아온 철없는 영이의 체험기

#오랫동안 금지되어 있던 일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사람들이 하나 둘 바다를 떠날 즈음이 되니, 저는 이제야 슬슬 바다가 그리워집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어쩐지 여름바다는 '짠물' 그 이상의 어떤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이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느껴지는 산책길을 걸으며 함께 걷고 있던 반려견을 내려다보며 묻습니다.

"우리 어느 바다로 갈까?"


순간 왜 그곳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고성'

누군가가 제 귀에다 대고 속삭이기라도 한양 정확히 마음에 들리는 그곳, 고성..

가지 말았어야 했고, 오랫동안 가고 싶지 않았던 곳..


그곳에서 남동생이 아주 먼 길을 떠났습니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지만 그 아픔은 마치 어제의 일처럼 기억에 선명하죠. 친구네 가족을 따라 여행을 떠난 동생의 소식은 실종사고 전화로 전해져 왔습니다. 마침 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제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감이 멀어 상대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던 첫 전화.. 하지만 구급차의 비상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습니다. 상대의 목소리를 굳이 듣지 않아도 뭔가 좋지 않은 일이 그곳에서 벌어졌다는 직감이 들더군요. 끊기고 다시 걸려오고를 반복했던 그 전화.. 결국 119 구급대원의 목소리로 그 불행한 사고 소식을 또렷이 들어야만 했습니다. 동생이 바다에서 실종됐고 지금 119가 수색 중이라고..


그때 동생의 나이 중학교 2학년, 제 나이 고등학교 1학년..


결국 동생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발견되었습니다. 살아만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하늘에 대고 울며 빌었건만.. 끝내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지요. 엄마와 전 다른 가족들보다 먼저 동생이 안치돼있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며칠..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은 만큼 처참한 모습들과 느낌들을 보고 견뎌내야 했습니다. 죽음이 그렇게 가까이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던 17살 어렸던 시절의 정신적 충격..


지금도 그때 처음 걸려왔던 구급대원의 전화 목소리, 시신이 되어 누워있던 동생의 얼음장 같았던 살결의 촉감, 한 줌의 재가 되어 손에 닿았던 느낌까지.. 모두 지울 수가 없습니다. 어제의 일처럼 너무도 선명하니.. 7월 중순에 떠난 동생 때문인지 그 이후론 왠지 여름이 오는 게 반갑지 않더군요. 그 친구가 떠난 그곳 바다에는 얼씬도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가고 싶지 않았죠. 다시 똑같은 아픔을 직면하기가 겁이 났던 모양입니다.



그랬었는데.. 갑자기 그곳 바다가 왜 떠오른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 그동안 잘 지냈냐고.. 아픔으로 무너지지 않고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때가 되었나 봅니다. 그동안 금지되어 있던 무엇이 자연스레 해제가 되어야 할 때..


마음을 괴롭히는 모든 일들엔 그런 때가 있다고들 해요. 의식적인 노력도 필요하지만 마음이란 게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으니까.. 그럴 땐 시간에 모든 걸 맡기는 게 좋다고 합니다. 죽도록 미워서 마음을 괴롭히던 누군가가 어느 날 문득 '그 사람도 이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으로 전환되는 날.. 그날이 진정 그 사람과 이별하는 날이라고 하더군요. 모든 식물이 꽃피우는 시기가 각기 다른 것처럼 인생의 어느 멋진 날도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살면서 점점 시간의 마법을 무시할 수 없게 되는 것 같아요. 결국 인간도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존재이니 말입니다.


가을에 국화 한 송이 들고 동생이 떠났던 그곳 바다에 한 번 다녀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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