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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 영 Sep 27. 2019

불혹, 그러나 흔들리는..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거부한 철없는 영이의 성장 이야기

나에게 선의의 거짓말은 필요 없었다.


내 남은 인생을 그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한 날, 난 그의 품에 안겨 단 한 가지를 소망했다.

그에게 바란 것은 돈도, 명예도.. 나를 위한 어떤 극단적인 희생도 아니었다.

단지 그에게 원하고 약속받고 싶었던 것은 그의 심장 안에 존재하는 내가 다른 이와 그 공간을 공유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 그것뿐이었다.


순간에 열정적이던 심장이 영원히 내 소유 일리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혹여나 다른 이가 그 심장에 문을 열고 들어오려 할 때 내게 그 사실을 숨김없이 얘기해달라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울며 불며 매달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더 이상 그 공간은 내 영역이 될 수 없으니 말없이 자리를 비워주겠노라 약속했다. 13년을 함께했던 사람이 남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충분히 연습했던 일이었다. 이제 막 부푼 꿈들을 얘기하기도 벅찬 그 밤들 속에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말들을 그에게 늘어놓았다. 


사실은 너무나 겁이 났는지 모른다.


누가 그 심장의 문을 열고 저벅저벅 내 곁으로 다가와 조금씩 나를 밀쳐내버릴까 봐.. 

내 눈을 가린 달콤한 그의 거짓말 때문에 내 공간을 잠식당하면서도 바보같이 그 자리에 인형처럼 서있게 될까 봐..

지독하고 처절하게 치른 선행학습의 효과로 사실 난 사람을, 아니 사랑을 믿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던 것 같다.

너무나도 포근하고 달콤했던 그의 품 안에서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나에게 선의의 거짓말은 필요 없어. 그 어떤 것이든, 설령 그것이 나를 파멸시킬지 모르는 어떤 위험한 것일지라도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모든 걸 말해주었으면 좋겠어.."


그의 모든 걸 알고 싶었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변해버린 사랑'으로 내게 상처를 줄 여지가 있는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변해버린 사랑.. 그래, 잠시 마음은 아프겠지만 그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단지 내가 걱정한 것은 또 바보가 되는 일이었다. 뜨겁지 않은 사람의 등을 바라보는 일.. 그의 일상에서 때로는 숨겨져야 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 사랑의 나태함을 모른 채 나만 혼자서 어제보다 더 큰 사랑을 부끄럽게 내밀게 되는 일..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한 일이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 길에 수없이 놓인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와 피를 철철 흘리는 발로 그에게 갔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그 지옥을 얘기하며 그에게 쉬고 싶다 이야기했었다. 지친 숨을 몰아 쉬는 나를 따뜻하게 감싸 안은 그가 자신의 가슴 언저리를 보여주었다. 

"깊이 파이고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내 가슴에도 있어.."

그래서 우린 서로의 상처를 끌어안기로 약속했었다. 





사랑했던 사람의 가슴에 '배신'이란 상처를 새겨 넣고, 그런 그녀가 세상을 뜨자마자 단 두 달 만에 새 사랑을 시작했던 사람.. 열지 말았어야 했던 판도라의 상자..

죄 없는 불쌍한 그녀를 답답한 미련 곰탱이로 만들어 내 앞에 늘어놓았던 말들.. 그 속에 정작 내가 듣고 싶었던 고백들을 숨긴 채..

과거의 일로 나를 잃기 싫었다는 듣기 좋은 변명이 돌아왔지만.. 뭇 여성과의 대화 속에 나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숨기는 그를 보며..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변해버린 사랑이 아니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이건 사랑이 아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난 그저 노리개였을 뿐..


3개월 후면 마흔..

난 여적 이러고 산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고 살까..

쉰 살이 넘은 지인도 여적 이러고 살더라..

사랑은 나이를 먹는다고 철이 들지도 않고

사람이 맘먹고 속내를 감추면 그것도 여간해선 알 길이 없더라.

불혹..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볼혹에..

난 여전히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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