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학계 원로단, "화성 지하 문서, 왕의 공식 승인 없는 '습작'일 가능성 제기"
[뉴스특보] <민국약장>, 결정적인 '국새(國璽)'가 없다... 효력 논란 점화
대한민국은 또다시 둘로 쪼개졌다.
지하 벙커에서 발견된 정조의 <민국약장(民國約章)>은 그 내용의 파격성 때문에 오히려 거센 역풍을 맞고 있었다
박진철은 구속되었지만, 그가 수십 년간 뿌려놓은 '이권 카르텔'의 뿌리는 깊었다.
그들은 문서의 내용이 아닌, '형식'을 물고 늘어졌다.
수원 화성 박물관, 이준의 임시 연구실.
TV 화면 속에서 평생을 어용학자로 살아온 문화재청 자문위원 최 교수가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보십시오! 조선의 모든 공식 문서에는 붉은색 왕의 도장, 즉 국새나 어보(御寶)가 찍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문서에는 그 어디에도 도장이 없습니다. 이것은 정조가 밤에 혼자 술을 마시며 쓴 몽상적인 일기장이거나, 폐기된 습작에 불과합니다! 국가의 근간을 이런 낙서에 맡길 순 없습니다!"]
"저, 저... 늙은 여우 같은 놈이!"
수영이 분을 참지 못하고 리모컨을 던지듯 TV를 껐다.
"선배, 어떡해? 인터넷 여론도 흔들리고 있어. '도장도 안 찍은 계약서가 무슨 효력이냐'고 난리야."
이준은 대답 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벙커에서 가져온 유물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는 묵묵히 돋보기를 들어, 상자 가장 깊은 구석, 붉은 비단 틈새에 구겨져 있던 손가락만 한 한지 조각을 다시 살폈다.
거기에는 정조 특유의 흘림체로, 수수께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印不刻石 映水而顯 (인불각석 영수이현)] [도장은 돌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비추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 붓을 꾹 눌러 쓴 굵은 한 글자.
<水 (물 수)>
"도장을 돌에 새기지 않았다... 물에 비춘다..."
이준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정조는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서양 과학(서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과학자였다. 그리고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한 낭만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평생 과업인 <민국약장>에 도장을 찍는 것을 '깜빡'했을 리가 없다.
"수영아. 정조 대왕이 가장 사랑했던 공간이 어디지?"
"당연히 화성이지."
"화성 안에서도, 가장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건물."
"어...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이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벽에 걸린 수원 화성 전도를 떼어내 책상 위에 펼쳤다.
"맞아. 방화수류정. '꽃을 찾고 버들을 쫓는 정자'. 군사 시설인 동북각루(각루)를 짓는다면서, 정조는 십자(十字)형 지붕을 가진 세상에 없던 아름다운 정자를 만들었어. 그리고 그 아래 인공 연못 용연(龍淵)을 팠지."
이준은 컴퓨터를 켜고 방화수류정의 3D 설계도를 띄웠다.
"학자들은 그저 아름다움을 위한 파격이라고 했어. 하지만 정약용이 설계했다면? 그 복잡한 지붕의 곡선이 철저하게 계산된 **'광학 장치(Optical Device)'**라면?"
이준의 손가락이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1796년(화성 완공 해)의 천문 데이터, 태양과 달의 궤적, 방화수류정 지붕의 각도, 용연 수면까지의 거리. 수십 개의 변수가 모니터 위에서 춤을 췄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시공간 좌표가 일치하는 순간, 이준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계산 결과 일치
날짜: 음력 8월 15일 (추석) / 보름달(Full Moon)] [시간: 자정 (00:00) / 달의 남중고도 76도]
"오늘이야."
이준이 전율하며 속삭였다.
"오늘 밤이 1년 중 달이 가장 밝다는 슈퍼문이야. 정조 대왕은 230년 전, 이 '빛의 도장'을 설계해 놓고 후손들이 찾아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수원 화성, 방화수류정 아래 용연 / 밤 11시 40분
이준이 SNS에 예고한 시각이 다가오자, 용연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시민들, 유튜버들, 그리고 이준의 주장을 반박하러 온 학계 관계자들과 기자들이 뒤섞여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늘에는 거대한 은쟁반 같은 보름달이 떠올라, 고요한 연못 위로 은가루 같은 윤슬을 뿌리고 있었다.
"이보게, 젊은이."
최 교수가 팔짱을 낀 채 이준에게 다가왔다. 그의 뒤에는 카르텔의 사주를 받은 험상궂은 남자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물 위에 글자가 뜬다니? 자네, 역사학자가 아니라 마술사였나? 헛소문으로 국민을 현혹하면 사기죄로 고발할 거야."
이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교수님. 역사는 박물관 유리관 속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물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밤 11시 55분.
달이 방화수류정의 지붕 정수리를 향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정자의 화려한 팔작지붕 그림자가 검은 먹물처럼 연못 수면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하지만 아직은 그저 뭉개진 검은 덩어리였다.
밤바람이 불어 수면이 일렁이자, 그림자는 흉측하게 일그러진 괴물처럼 보였다.
"저것 봐. 그냥 그림자잖아."
"쇼였어? 실망이네."
군중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최 교수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그렇지. 철수합시다! 이런 사기극을 볼 필요도..."
"바람이 멎어야 해."
수영이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제발!"
자정(00:00). 기적처럼, 혹은 하늘의 뜻처럼. 밤새 불던 바람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요동치던 용연의 수면이 순식간에 검은 거울처럼 매끄러워졌다.
그 고요한 정적 속으로, 밤하늘 가장 높은 곳(남중)에 도달한 보름달이 강렬한 빛의 화살을 쏘아 내렸다.
촤아아-
방화수류정의 그 복잡하고 기괴해 보였던 십자형 지붕 그림자가, 수면 위에서 광학적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이 사용했던 왜상의 조선식 구현이었다.
"왜상이란 찌그러진 상을 특정 각도에서 보면 정상으로 보이는 기법이야."
이준이 수영에게 설명했다.
좌우로 삐죽하게 퍼져 있던 처마의 그림자가 물 위에서 굴절되며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어지러운 곡선들이 사라지고, 간결하고 힘 있는 직선 두 개가 남았다.
서로 다른 두 개의 획이, 서로의 어깨를 기대어 지탱하는 형상.
< 人 >
칠흑 같은 연못 한가운데, 달빛을 배경으로 선명하고 거대한 '사람 인(人)' 자가 떠올랐다.
"아..."
현장에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카메라 셔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압도적인 침묵.
그것은 왕을 상징하는 용(龍)도 아니었고, 불로장생을 비는 십장생도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글자였다.
최 교수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는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학문적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압도적인 진실의 미학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
"보십시오. 저것이 정조 대왕이 <민국약장>에 찍고자 했던 진짜 옥새입니다."
이준은 물 위의 글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기존의 옥새는 돌에 새깁니다. 변하지 않는 권위, 백성 위에 군림하는 영원한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죠. 하지만 정조는 자신의 마지막 옥새를 물에 새겼습니다. 물은 곧 백성입니다. 그리고 저 글자를 완성하는 빛은 하늘입니다. 사람(人)이라는 글자는 혼자서는 설 수 없습니다. 하늘이 비추고, 백성(물)이 받아주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도장. 이것은' 왕의 권력은 백성이라는 바탕 없이는 아무런 형체도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군주 스스로의 준엄한 자기 고백입니다."
사람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230년 전, 외롭고 고단했던 개혁 군주가 미래의 시민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가 그곳에 있었다.
붉은 인주가 아닌, 달빛과 물로 쓴 영원한 계약서.
그때, 다시 미세한 바람이 불어왔다.
찰랑-
고요했던 수면이 흔들리자, 물 위에 떠 있던 거대한 <人> 자가 수만 개의 빛 조각으로 부서졌다.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한 사람의 형상이 수많은 민중 속으로 스며들어 퍼져 나가는 듯한 장엄한 광경이었다.
"보세요! 도장이 깨지는 게 아니에요."
수영이 울먹이며 외쳤다.
"사람이... 사람들에게로 번져가고 있어요."
이준은 밤하늘의 달과, 부서지며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물결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천인무격(天人無格). 하늘과 사람 사이에는 격이 없다."
"백성이 곧 하늘이니, 옥새 또한 마땅히 하늘과 물이 찍어야 한다."
이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그리고 수백 명.
그 박수 소리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수원 화성의 성벽을 넘고, 밤하늘로 울려 퍼졌다.
그것은 과거의 왕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주인 된 시민들' 스스로를 향한 헌사였다.
방화수류정은 달빛 아래서 그 어느 때보다 의연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곳은 더 이상 왕의 정원이 아니었다. 기억하는 자들, 깨어있는 시민들의 성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