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민국

by 샤프

"저기다! 저기 박진철이 있다!"

"살인마 박진철! 총 버려!"

"와아아아-!"


수영이 켠 유튜브 라이브를 보고 인근에서 달려온 수원 시민들, 야경을 보러 온 관광객들이 성곽 위에서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고 구멍 아래를 비췄다.

수백, 수천 개의 빛. 그것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21세기의 횃불이었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빛에 야투경을 끼고 있던 박진철은 눈이 멀어버릴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아아악! 내 눈!"


콰직-

텅!

마침내 드릴이 벽을 관통했다.

이준은 뚫린 구멍 안으로 피 묻은 손을 뻗었다.

손끝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그는 50년 묵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검은 옻칠 상자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밤새 세상을 집어삼킬 듯 퍼붓던 폭우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젖은 성벽 위로 동쪽 하늘에서 푸르스름한 여명이 터오고 있었다.


현장은 숨 막히는 정적에 휩싸였다.


이준을 둘러싼 수백 명의 시민들, 현장에 출동한 경찰 병력, 그리고 스마트폰을 통해 이 장면을 지켜보는 전 세계 수십만 명의 라이브 시청자들. 모두의 시선이 이준의 손끝에 들린 검은 옻칠 상자에 고정되었다.

이준은 흙투성이가 된 손을 떨며 상자의 낡은 은색 걸쇠를 풀었다.


딸각.


230년, 그리고 50년.

두 번의 어둠을 견뎌낸 뚜껑이 열렸다.

그 안에는 세월의 풍파를 피해 진공 상태에서 보존된, 붉은 비단에 싸인 문서 뭉치가 놓여 있었다.


정조 대왕이 승하하기 직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써 내려갔으나 끝내 반포되지 못했던 비밀 국정 운영 계획서.

<민국약장(民國約章)>

이준이 문서를 펼쳤다. 먹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듯 선명한 필체.

이준의 목소리가 떨리지만 단호하게 새벽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제1조, 천인무격(天人無格). 하늘 아래 사람의 격은 없다. 왕과 노비는 그 맡은 바 직분만 다를 뿐,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같다. 오늘부로 조선의 신분제를 영구히 폐한다."

숨죽여 듣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과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18세기에... 신분제 폐지라고?"

서양의 시민혁명이 피로 쟁취했던 인권 선언보다 앞선 시기, 이 땅의 군주가 스스로 특권을 내려놓고 평등을 선언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충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준이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이준은 박진철을 똑바로 응시하며 다음 구절을 읽어 내려갔다. 이것이야말로 1975년의 권력자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금기(禁忌)였을 것이다.

"제2조, 군민계약(君民契約). 군주는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라, 백성이 생업을 편히 하기 위해 고용한 '큰 심부름꾼(大僕)'이다. 심부름꾼이 주인을 해치거나 게으르면, 주인은 그를 폐위할 수 있다."

현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인 '국민 주권'과 '저항권'이 230년 전 조선의 왕에 의해 명문화되어 있었다.

"들리나, 박진철? 너희 아버지가, 그리고 당시의 독재 정권이 왜 이 문서를 시멘트 속에 수장시켰는지 이제 알겠나?"


그리고 상자 밑바닥에는 낡은 가죽 노트 한 권이 더 있었다. 곰팡이 냄새가 나는 1975년의 다이어리였다.


1975년, 현장 소장 박정훈의 일기장이었다.


이준은 경찰에게 양팔이 결박된 채 끌려가던 박진철이 자신의 아버지의 일기를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 내려갔다. 1975년 10월 16일, 현장 소장 박정훈, 즉 박진철의 부친이 남긴 피의 고백이었다.


[1975년 10월 16일. 비가 온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소각하라고 했다. 이 종이 쪼가리 하나가 대학생들의 시위에 기름을 붓고, 각하의 심기를 어지럽힐 불온문서라 했다. 왕이 백성의 심부름꾼이라니... 지금 세상에서는 말조차 꺼낼 수 없는 불경함이다. 하지만, 각하의 명으로 이 위대한 꿈을 차가운 콘크리트로 덮는 나는... 비겁한 죄인이다. 나는 독실한 불자로서, 차마 성군(聖君)의 유언을 불태우지는 못하겠다. 미신이라 비웃겠지만, 태우면 천벌을 받을 것 같아 두렵다. 그래서 묻는다. 우리는 지금 '국민 수준이 낮아 통제가 필요하다'며 이 진실을 덮지만... 훗날 이 단단한 벽을 뚫고 들어올 후손들은, 부디 나보다 용감하고 정의로운 세상에 살고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거짓말이야... 그럴 리 없어! 아버지가 그럴 리 없어!"

박진철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무릎이 진흙탕에 처박혔다.

그는 평생 자신의 아버지가 역사를 냉철하게 재단하고 통제했던 '강력한 지도자'였다고 믿었다.

자신 역시 그 피를 이어받아 우매한 대중을 이끄는 엘리트라 착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진실은 잔혹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저 시대의 광기 앞에서 벌벌 떨던 나약한 인간이었고, 불태우지도 드러내지도 못한 채 '미래의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긴 비겁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비겁한 양심이, 마지막 순간 이준에게 닿아 역사를 살려냈다.

자신의 평생이 헛된 망상과 열등감 위에 지어진 모래성임을 깨달은 박진철. 그는 수갑을 찬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동북공심돈 앞마당이 떠나가라 짐승처럼 오열했다.

여명이 밝아오는 성벽 위로, 그 처절한 울음소리가 230년 묵은 한(恨)처럼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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