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haun SHK
Mar 16. 2019
<가타카>-Never saved anything
영화는 생명공학이 발달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전자 조작으로 맞춤형 아기가 탄생 가능하고
단 한 방울의 피나, 단 한 번의 소변검사로 한 개인의 유전자 정보를 어려움 없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업에서 직원을 뽑더라도 면접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간단한 유전자 샘플 하나면 누가 우월한 인재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빈센트는 유전자 조작 없이 태어났고 상대적으로 열등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동생 안톤은 우월한 유전자만을 골라서 태어났습니다. 빈센트는 모든 면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공 빈센트는 우주비행사가 되려는 꿈을 위해 노력하지만 유전적으로 우월한 지원자들에 밀려 경쟁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한 개인의 재능과 적성, 그리고 잠재력은 모두 유전자 속에 담겨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선천적으로 주어진 유전적 설계도면을 뒤집기는 불가능합니다.
우주비행사가 될 사람이나 건물 청소부가 될 사람은 이미 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출생시의 유전자에 따라 계층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 빈센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자의 신분을 빌립니다. 그리고 우주비행사가 되기 위해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영화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주인공이 유전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꿈에 한 걸음씩 다가간다는 점입니다.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빈센트와 안톤의 수영 장면입니다.
세 번의 수영 SCENE
영화에서는 수영 장면이 세 번 나옵니다.
#1
첫 번째는 유년시절의 빈센트가 동생 안톤과 수영 대결을 하는 장면입니다.
'치킨(겁쟁이) 게임'이라고 해서 바다를 향해 계속 수영하다가 누군가 겁먹고 포기하면 패배하는 대결입니다.
어린 빈센트는 이를 악물고 수영하지만, 우수한 유전자만을 가지고 태어난 동생 안톤에게 항상 패배합니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지적, 신체적으로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동생을 넘어서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2
두 번째 수영 장면.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빈센트는 안톤에게 다시 도전합니다.
빈센트는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동생을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습니다.
안톤이 힘에 부쳐 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빈센트는 물에 빠진 안톤을 구해 해안가로 데려옵니다.
처음으로 동생에게 승리를 거둔 빈센트가 깨닫습니다. 불가능이란 없다는 사실을.
#3
세 번째 수영 장면.
형 빈센트와 동생 안톤이 나이가 들어 다시 조우합니다.
신분을 속이고 우주비행사가 된 빈센트가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 안톤과 수영 대결을 펼칩니다.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동생은, 열등하고 결함 많은 유전자를 가진 형보다 더 뛰어난 존재임을 입증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두 번째 수영 장면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생 안톤은 힘에 부쳐 포기하게 됩니다.
안톤이 형 빈센트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이렇게 한 거야?
그러자 빈센트는 대답합니다.
내가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지 궁금했겠지.
난 돌아갈 힘을 두지 않아 널 이기는 거야.
(I never saved anything for the swim back.)
I never saved anything for the swim back.
빈센트는 우주비행사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힘과 역량을 끌어냅니다. 전력을 다해 앞만 보고 달려 나갔고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부었습니다.
빈센트가 유전적인 열등함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돌아갈 힘을 남기지 않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I never saved anything for the swim back.)
우리는 성공스토리를 좋아합니다. 특히 주어진 환경의 제약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이야기에 열광합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빈센트의 집념과 열정에 감탄했습니다. 유전자에 따른 신분차별이라는 벽을 허물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빈센트는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이었고 유전자 중심 사회를 극복한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다시 본 느낌은 조금 달랐습니다.
돌아갈 힘을 남기지 않으며 전력을 다하는 것이 내적으로 얼마나 큰 고통일지 감히 짐작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는 삶은 많은 인내와 시련을 동반합니다. 전력질주를 오랫동안 하기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 것입니다.
어렸을 때 봤던 빈센트는 환경을 극복한 거인이고 시대와 싸워 이긴 한 명의 영웅이었지만
지금 다시 본 빈센트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제약을 극복한 외로운 투쟁가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날 때부터 주어진 것이 있고, 성취해서 얻어낸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피부색을 초콜릿색으로 할지, 카스텔라 색으로 할지, 생크림색으로 할지에 대해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첫 걸음마하는 곳을 수영장 딸린 대저택으로 할지, 온 가족이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자그마한 단칸방으로 할지에 대해서도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었던 조건이 많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조건과 배경만으로 우리를 판단하고 평가한다면 억울함이 들지 않을까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것들로 고심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면 개인적으로는 비극이고 사회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한 일입니다.
우리는 각자 인생에서의 빈센트입니다. 우리는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다만 우리가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천적 환경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불공평합니다.
우리가 치열하게 사는 이유가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였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나의 꿈을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들고 나이가 들고 영화를 보면 영화는 다시 읽힙니다. 그래서 명작영화나 흘러간 영화를 다시 찾아보는 것 같습니다. 영화 속 빈센트는 중학생의 눈높이에서는 영웅담이었지만 30대의 눈높이에서는 시대와 투쟁한 가슴 아픈 일대기입니다.
세상 모든 빈센트들이 선천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 싸웠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모든 빈센트들이 돌아갈 힘을 남기지 않으며 노력하는 것(Never saved anything)을 응원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영화 속 빈센트와는 완전히 달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