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이런 유형에 속합니다. 이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엄청난 극찬들을 받고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을 했지만 대중성이 높은 영화는 아닙니다.
이 영화에 대해 물어보면 영화에 관심이 많은 친구가 아니라면 대개는 제목만 들어봤다는 대답이 대다수입니다. 가끔 등장인물의 헤어스타일 이야기가 나옵니다.
웃긴 단발머리 헤어스타일 한 아저씨 나오는 거 아냐?
그 우스꽝스러운 헤어스타일의 주인공은 무시무시한 배역을 소화한 하비에르 바르뎀입니다. 그의 명연기가 단발머리 헤어스타일을 세상 어디에도 없을 희대의 사이코패스 스타일로 탈바꿈시킵니다.
헤어스타일이 굳이 단발머리인 것도 범상치 않고 총이나 칼이 아니라 산소탱크를 이용해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영화초반에 안톤이 도로변에 서 있는사람을 산소탱크와 연결된 스턴건으로 느닷없이 살해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관객들을 일순간에 큰 쇼크에 빠지게 만듭니다.
차분한 태도로 갑자기 살인을 저지른다는 점,
범행 후에도 대단히 태연한 태도로 자신의 길을 간다는 점, 살인의 도구가 살상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 놀랍습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환한 대낮의 공공장소에서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그러한 범행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상상을 넘어선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에서 안톤의 살인공식은 너무나 예측불허이기 때문에 관객은 그가 등장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긴장을 하게 됩니다. 초반에 예상치 못한 살인 장면으로 급작스런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기 때문에, 이제 관객들은 그가 등장할 때마다 갑작스런 살인을 대비하게 됩니다.
그가 아무런 위협적인 동작을 취하지 않고 그저 대화만 나눌 뿐인데 긴장감과 불안함은 극도로 높아집니다.
특히 그가 도로변의 한 주유소에 들르는 장면에서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집니다. 가게 주인과 안톤은 일상적인 날씨 이야기로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의 말이 안톤의 심기에 거슬렸나 봅니다.
어디에서 오는 길인지 주인이 짐작하는 것을 알고
안톤의 눈빛과 태도가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살기어린 그의 태도에 주인은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살기어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주유소 주인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불안을 느낍니다.
그러다가 안톤은 다짜고짜 동전던지기를 제안합니다. 느닷없는 제안에 주유소 주인은 무엇을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안톤이 다시 말합니다.
댁 목숨을 걸었지, (당신은) 모르고 있을 뿐.
동전던지기 결과가 보여지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관객들은 손에 땀이 차는 서스펜스를 느낍니다.
서스펜스
최고의 서스펜스는 바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만 같은 상황에서 관객들은 긴장감을 안고 화면을 초조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관객이 우려하는 일은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 관객이 어떤 감정을 느끼게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대단히 영리하게 서스펜스를 이끌어냅니다.
일상적인 장소에서의 일상 대화 속에서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느닷없이 살인을 범하는 모습을 한번 봤기 때문에, 그가 또 예측불허의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긴장감을 안고 영화를 보게 됩니다.
서스펜스는 불안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불안한 심리상태에서 불쾌한 충격을 기다릴 때 서스펜스는 최고조에 달합니다. 폭력이 남발하고 살인이 발생하는 순간보다는 그 폭력성과 잔혹성이 나오기 직전의 긴장감이 우리를 강한 서스펜스로 이끕니다.
우리는 스크린에서 살인이 저질러지는 순간에 큰 충격을 받지만, 불안감은 살인장면이 나오기 직전의 묵직한 분위기 속에서 가장 크게 형성됩니다. 차라리 충격적인 장면이 나오고 나면 놀람과 충격을 느끼더라도 불안은 사라지게 됩니다. 서스펜스는 충격보다는 불안에 더 가깝습니다. 서스펜스는 살인의 장면보다는 폭력성이 터져 나오기 직전의 분위기 속에서 최고조에 달합니다.
서스펜스 가득한 잘 만든 영화를 보면, 초반에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준 후 그와 같은 충격이 언제든 발생될 지도 모른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관객들을 불안에 빠뜨립니다. 어떤 살인이 전형적인 배경 - 예를 들면 비내리고 어두운 밤의 가로등도 없는 으슥한 골목길 - 에서만 발생된다면, 환한 대낮의 일상적인 공간에서 서스펜스를 느끼진 않습니다.
하지만 환한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살인용이 아닌 도구로, 일상적인 분위기 속에 느닷없이 살인이 벌어졌다면 이제 관객들은 대비해야 합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밝은 낮이라도 살인이 발생할 수 있음을 예측해야 합니다.
폐쇄된 실내뿐만 아니라 탁 트인 실외에서도 언제든 폭력성이 터져 나올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등장인물의 손에 총이 아니라 산소탱크가 쥐어져 있더라도 상대방이 피를 흘리며 쓰러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주유소 장면으로 돌아가 보면, 관객은 갑작스런 충격을 받지 않기 위해 살인마 안톤이 대낮에 주유소 주인과 대화하는 장면에서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일상적인 날씨 이야기로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조차 언제 살인을 할지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이미 한번의 큰 충격을 안겨준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충격에 대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톤이 대낮에 등장하더라도 긴장하고, 등장인물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도 불안해집니다. 단순히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 일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데서도 서스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은 탁월한 연출입니다.
서스펜스가 높으면 관객들의 몰입도는 올라갑니다. 고조되는 서스펜스 속에 관객들의 시선은 스크린에서 떨어질 줄 모릅니다. 그렇다고 영화 내내 강도높은 서스펜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영시간 내내 강한 서스펜스만 있다면 절반이 채 지나기도 전에 정신적인 피로를 느낄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적당한 순간에 팽팽하게 이어지던 서스펜스를 터뜨려 줍니다. 중간중간 응집된 서스펜스를 폭력성으로 분출시키고 나면, 다시 새로운 인물 간의 대화나 만남에서 서스펜스를 하나씩 조성해 나갑니다.
서스펜스를 만드는 방식
비오는 도시 뒷골목, 늦은 밤 가로등도 없는 으슥한 오솔길에서 벌어지는 살인보다 어쩌면 환한 대낮에 일상생활을 하는 공간에서 예고없이 터지는 살인이 오히려 더 자극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공간이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불안감은 더 커집니다. 마음을 놓고 쉬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다면 불안의 정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정말 무서운 공포영화는 비내리는 어두운 밤에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밝은 대낮에 일상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서 더 크게 느껴집니다.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은 언제 어디서든 살인이 벌어지고 공포가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대낮에 벌어지는 뜬금없는 살인이 더 공포스럽게 보이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감정은 현재적인 것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쁨을 느끼는 것,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행복을 느끼는 것은 현재적인 감정입니다.
반면 어떤 감정은 우리의 과거경험과 상상이 어우러져 만들어집니다. 발표에서 실수한 경험이 있다면 사람들 앞에 설 때마다 불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수영을 하다가 물에 빠질 뻔한 경험이 있다면 깊은 물만 봐도 공포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나온 불쾌한 살인 장면을 보고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불안감을 느끼는 경우는 후자에 해당합니다. 영화 속 불안과 서스펜스는 현재적인 감정이라기 보다 우리가 목격한 영화 초반의 충격적인 장면들로 인해 방어심리가 쌓아 올린 감정들입니다.
훌륭한 스릴러 영화는 관객의 마음을 자극하여 우리가 스스로 서스펜스를 쌓아 올리도록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뛰어난 서스펜스를 가진 영화라고 부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