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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May 09. 2021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우리는 매 순간을 ‘나’ 답게 살아가고 있을까. 애초에 나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어차피 보여지는 말과 행동 전부가 나의 일부분일 텐데, 그 너머에 스스로도 몰랐던 진정한 내가 있다는 뜻일까. 나도 몰랐던 내가 내 안에 있다면, 왜 그 녀석은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 무엇이 두려워 내 안에 꽁꽁 숨어버렸을까.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철석같이 믿고 살아왔던 신념이 부정당하는 순간이. 어린아이들의 다툼을 중재하기 위해 어른들은 종종 주의를 준다.

“친구랑 싸우면 못써요. 얼른 화해해.”

그렇게 어른들은 의도치 않게 아이들에게 유년기의 신념을 주입한다. 친구와 싸우는 건 나쁜 행동이라는 신념을. 그 당시에는 사소한 이유로 얼굴들을 붉히곤 하는 아이들의 싸움을 금지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장하다 보면 마냥 싸우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최선의 상황을 위해 때로는 의견 대립이 필요하고, 비리에 맞서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런 상황이 오게 된다면 유년기의 신념 ‘친구랑 싸우면 못써요’는 응당 취해야 할 행동을 제약하는 족쇄가 될 뿐이다. 한 번 뇌리에 박힌 신념은 쉽게 바꿀 수가 없다.

‘금지되었다’는 그러니까, 영원한 것이 아니야. 바뀔 수 있는 거야.

-데미안

하나의 행동이 상황에 따라 해석되는 바가 다르듯 하나의 신념 역시 모든 상황에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없다. 한 세계의 옳은 신념은 다른 세계에서 역기능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마치 유년기의 두 세계,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중에서 전자에 속했던 싱클레어의 선함이 후자에 속했던 프란츠 크로머의 악함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처럼. 우리가 속했던 가정이 화목했을진 몰라도 세상이 마냥 선하지만은 않기에, 또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더라도 세상이 마냥 악하지만은 않기에, 기존의 신념에서 벗어나야 할 상황은 분명히 찾아온다.


하지만 기존의 신념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하나의 세계를 부수는 일이고,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나’라는 존재를 다시 정의 내리는 일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부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이야기 속 아프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과제를 지닌 어떤 신성’이다.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 선과 악. 나와 너. 옳고 그름. 신실과 방탕. 진실과 거짓. 이러한 이분법의 경계를 허물고 ‘비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맞이해야 할 마중물, 용기가 바로 아프락사스다. 즉, 절대 하지 못할 것 같은 행동을 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일,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일,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일, 고통에 직면하는 일,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 모두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다시 태어나는 일이고 하나의 세계를 부숴야 하는 일이다.


아프락사스. 비범한 결정을 위한 용기. 이는 결국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억눌린다. 내면의 ‘나’는 자신의 목소리가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아 지레 겁을 먹고 마음 깊은 곳에 숨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잃은 채 살아간다. 진정한 목표를 앞에 두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되는데, 두려움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꼴이다.


알을 깬다는 것은 자신을 가두는 세계를 부수는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가 외치는 비범한 결정을 위해 타인의 시선을 극복하는 것이다. 투쟁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아마 세상의 질타를 받을 것이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들려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처럼, ‘카인의 표적’을 지닌 비범한 사람들은 안락하고 게으른 현재의 질서를 전복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러한 표적을 지닌 사람들을 억누를 것이다. 그들이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억누른 것처럼.

연대란 멋진 일이지. 그러나 지금 도처에 만발해 있는 것은 전혀 연대가 아니야. 진정한 연대는 개개인이 서로를 앎으로써 새롭게 생성될 것이고, 한동안 세계의 모습을 바꿔놓을 거야.

지금 연대라며 저기 저러고 있는 것은 다만 패거리짓기일 뿐이야. 사람들은 서로에게로 도피하고 있어. 불안하기 때문이지. 왜 불안한 걸까?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해서 불안한 거야.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그들 모두가 그들의 삶의 법칙들이 이제 맞지 않음을, 자기들이 낡은 목록에 따라 살고 있음을 느끼는 거야. 그들은 더 이상 최선이 될 수 없는 이상들에 매달려 있어. 그러면서 새로운 이상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는 돌을 던지지.

곧 싸움이 벌어질 거야. 오늘날의 이상이 얼마나 가치 없는지 밝혀질 거야. 지금 이 세계는 죽으려 하고 있어. 종말이 시작될 거야.

-데미안


두렵지만 중요한 일을 해내기 위해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내면의 ‘나’와 마주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스스로와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어.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좋은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운명을 굴절 없이 살아내는 것이었다. 진실한 직분이란 오직 그것 한 가지였다.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싱클레어는 내면의 ‘나’와 소통하기 위해 예술을 적극 활용한다. 그는 흰 도화지에 끊임없이 내면의 ‘나’를 그린다. 그림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다시, 또 다시 반복해서 그려나간다. 실패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그는 내면의 ‘나’와 마주하게 된다. 내면의 ‘나’는 나이가 없었고, 싱클레어를 닮았고, 데미안을 닮았고, 남성이기도 했고, 여성이기도 했으며, 굳어 있으면서도 생기 있었고, 삶이기도 했고 죽음이기도 했다. 내면의 ‘나’에게는 경계가 없었다. 싱클레어는 마침내 ‘나’에게로 가는 길을 찾은 것이다. 우리 안에는 인류의 모든 역사와 유전 정보들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걸 깨달은 이상 어떠한 신념도 그를 가로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발목을 옥죄는 모든 두려움을 떨쳐내고 비범한 결정을 향해, 아프락사스를 향해 도약한다.

그 새(아프락사스)를 만나자 모든 것이 나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쳤다. 나의 마음속에서 긍정되고, 대답되고, 시인되었다. 우리가 얼마나 창조자인가. 우리 영혼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세계의 끊임없는 창조에 관여하는가. 바깥 세계가 몰락한다 하여도 우리들 중 하나는 그 세계를 다시 세울 능력이 있었다. 우리는 세계의 총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용기는 결국 경계를 허무는 것이었다.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었다. 선에 갇혀, 때로는 악에 갇혀 편협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분법 너머의 진실을 보는 것이었다.


한편, 소설을 읽다 보면 이야기가 자칫 악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에, 비범하지만 어쩌면 위험한 책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데미안(Demian)은 악마(Demon)를 연상시킨다. 싱클레어를 괴롭혔던 프란츠 크로머는 데미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겁을 먹고 도망간다. 또한 현재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신념을 지녔단 점에서 데미안은 어떤 의미에서는 악마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악마가 아니라 더 나은 대안을 창조할 수 있는 초인적인 존재로 데미안을 바라보는 것이 작가 헤르만 헤세의 의도에 더욱 부합하겠다는 생각이다. 기존의 법칙을 전복하고 새로 내세우는 대안이 우리의 삶을 발전시킬지, 아니면 혼란만 가중시킬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어쩌면 그건 우리가 스스로와 얼마나 많은 대화를 하며 자기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지에 따라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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