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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Jun 26. 2021

삶의 동력

황혼

어떤 색은 잊혀진 수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수문이 열리면 그동안 잊고 살아왔던 기억들이 넘쳐흘러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킨다. 기쁘고, 아련하고, 때로는 슬픈 추억의 색깔들을 전달하는 빛은 나에게 필요한 감정을 닮은 색을 간직한 채 찾아온다. 마치 누군가가 날 일깨워주려고 보낸 전령처럼.


그 빛을 본 건 나른한 주말 오후였다. 16시에서 17시 어간,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루 종일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놓고, 하루 종일 귀에서 조잘조잘 떠들어대던 에어팟을 빼내어놓고, 모든 것을 절전시킨 채. 포화되어 둔해진 감각을 되찾기 위해 쉬어가는 과정, 발열이 심한 배터리를 식혀가는 과정, 그 과정 속에서 빛을 보았다. 지는 해가 내뿜는 석양은 그날의 공기와 분위기, 몇 겹의 유리창들을 통과하여 어스름한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황금빛은 어릴 적 아빠와 주차장에서 공놀이하던 시절, 동생과 친구들과 얼굴에 모래 묻혀가며 놀이터에서 놀던 시절, 또는 집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들려오던 엄마의 웃음소리와 함께했던 나른한 황금빛과 꽤 일치했기에, 혼자 있었음에도 그날의 빛이 참 아름답다 느껴 무의식적으로 ‘황혼’이라 내뱉었다.


그 빛은 추억의 빛깔을 담고 있었다. 그날의 빛은 내 방 구석구석에 달라붙어 나의 현재와 지금을 추억으로 미화시키고 있었다. 소중한 금빛 그리움으로. 추억은 참 신기하다. 힘들고 아팠던 시절도 미화시키기에. 관계가 좋지 못했던 친구들이나 이불을 걷어차고픈 순간들도 지금 떠올려보면 전보다 가벼운 추억이 되어, 양쪽 입꼬리는 한결 가벼워진 그 추억들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다.


아픈 기억들을 견디고 살아가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미화일까, 반성일까, 아니면 망각일까. 누군가는 말한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과거는 찬란해진다고. 어쩌면 힘들었던 시기로부터의 반작용이 지금의 나를 만들기에, 우리는 각자의 아픈 기억들을 소중히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기억들은 우리가 지켜낸 것들이 소중한 것임을 끊임없이 일깨워 줄 수 있으니까. 고통의 기억들은 그렇게 우리의 삶을 붙들어줄 수 있으니까. 폭력의 아픔을 아는 아이가 주먹을 쓰지 않는 것처럼. 웃음이 많은 아이가 실은 누구보다도 슬픔을 잘 아는 것처럼.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채워지는 연륜이 아니라 쌓이는 기억들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마음의 크기일 테다. 시간이 흐른다고 모두가 동일하게 성장하는 것은 아니니까. 아프고 창피한 기억들도 아름다운 황금빛 추억으로 볼 줄 아는 나이, 지는 해와 같은 삶의 이정표를 받아들이고 기쁘게 주변인으로 머물 줄 아는 나이. 나도 그렇게 늙고 싶다. 황혼의 빛깔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인간은 낙타의 모습으로 태어나, 사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아이의 모습으로 노년을 맞이한다고도 한다. 교육 과정을 마친 아이가 입성한 사회는 아이에게 많은 것들을 요구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는 의심이나 불만의 여지없이 시키는 일을 낙타처럼 묵묵히 해나가지만, 삶의 경험들이 쌓여 옳고 그름을 분간하기 시작하면 사자처럼 투쟁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투쟁하여 얻게 된 자유 앞에서 그는 어리둥절하고 만다. 본래 우리는 무한한 자유를 불안해하기 때문에. 그는 규범을 부수고 나서야 깨닫는다. 인간이 방황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규범을 만들었다는 것을. 투쟁하는 사자는 자유 앞에서 제 역할을 잃고 만다. 우리는 자유를 갈망하지만, 때로는 구속을 바라기도 하기에.


통제와 자유 모든 부분에서 답을 찾을 수 없던 그는 그렇게 본연의 모습, 아이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유년기의 모습으로. 가정의 역경 속에서도 낭만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던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웅덩이의 첨벙거림에 깔깔 웃을 줄 알던 모습으로. 소소한 것에 감사할 줄 알던 모습으로. 손에 잡힌 막대기 하나에 온전히 집중할 줄 아는 모습으로. 편견에 갇히지 않고, 때로는 슬픔도 긍정하며. 어쩌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픈 모습은 우리의 처음 모습인 유년기의 모습일 수도 있다. 삶의 고비를 지나 정상에서 내려오는 시기를 의미하는 말인 ‘황혼’도, 아마 낙타와 사자의 삶을 거치고 유년기의 모습과 기억을 되찾은 사람들을 일컫는 단어가 아닐까?


어쩌면 인생은 우리에게 없는 걸 찾아 떠나는 모험이 아니라, 가지고 있었지만 상실된 무언가를 되찾기 위해 떠나는 모험일 수도 있다. 잊혀진 황금빛의 기억을 찾아 황혼을 마주하기 위해. 삶을 긍정하기 위해. 그 빛이 있는 곳을 따라가는 작은 나방이 되고 싶다.


<리틀 기딩>  T.S. 엘리엇

우리는 탐험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모든 탐험을 끝내면
우리가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 오리라.
그때야 처음으로 그곳을 알게 되리라.
알 수는 없지만 기억하고 있는 그 문을 통하여
아직 발견되지 않은 마지막 땅이
바로 시작한 땅이었다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긴 강의 수원지
숨은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
사과나무에서 속삭이는 아이들의 목소리
일부러 찾지 않아 알려지지 않았지만
들린다. 정적 속에서 희미하게 들린다.
바다에서 출렁이는 파도가 낮아질 때마다.
지금, 여기에서, 항상.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불꽃들이
왕관 모양으로 매듭지어질 때
불과 장미가 하나가 될 때
완전한 단순함을 위한 조건이 갖추어지고
모두 괜찮아질 것이고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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