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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Oct 02. 2021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반복의 열망

삶이 하나의 이야기라면 우린 그 이야기를 다시 고쳐쓸 수 있을까. 다시 한번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개울에 빠지지 않고 다리를 건널 수 있을까. 두려움을 극복하고 도전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원수와 손잡는 담대함을 지닐 수 있을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진솔함을 발휘할 수 있을까. 용기가 부족해 매듭짓지 못했던 모든 행동들은 결국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추락하는 씨가 되었다. 내 꽃은 그렇게 머물게 되었다. 겁이 나서 저들끼리 옹기종기 모인 채, 제대로 모험하지도 못하고. 이야기의 결말도 제대로 짓지 못하고.


만일 인생의 갈림길에서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사실 지금과 별 차이는 없을 것 같다. 어떤 길을 걷던, 내가 원한다면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으니까. 현재의 내 모습은 그나마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라 믿고 있으니까. 물론 부족한 것 투성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보다 더 나빴을 수도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지금이 최악은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이다. 적어도 내가 잘못 밟은 돌다리들을 다시 잘못 밟을 일은 없을 테니. 그렇게 내가 저질렀던 모든 잘못과 실수들을 긍정할 수 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바꿔나가면서 앞으로의 이야기를 고쳐갈 수 있다.


하지만 고쳐쓸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내 의지만으로 작용되지 않는 운명 같은 순간들. 어떤 나라에서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지 결정되는 순간들. 나의 선택 혹은 외력으로 인해 삶의 반경이 좁아졌던 순간들. 인연의 끈을 끊어버리기로 결심하는 순간들. 고쳐쓸 수 없는 이야기들을 만나면 난감하다. 경험했던 일이니 지울 수도 없고, 없었던 일인 척할 수도 없고, 그냥 적어나가자니 때로는 억울하고 화나고.


내게도 고쳐쓸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어릴 때부터 과학을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수학을 못해서 문과의 길을 선택했다. 생각보다 가볍고 순간적이었던 하나의 선택이, 꽤나 큰 파장을 가진 후회로 다가오더라. 어쩌다 보니 지금 내 앞에 펼쳐진 길들이 전부 가고 싶지 않은 길들이라서. 내 앞에 주어진 그 무엇을 한다고 해도, 어릴 적 우주를 좋아했던 동경과 설렘을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것 같아서.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가끔 친구들의 근황을 듣는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손절해봤던 친구들의 근황을. 고등학교 때보다 무척이나 성장한 그들의 모습을. 지금에야 생각해본다. 내가 그들의 철없음을 조금만 더 이해했더라면 어땠을까. 숨 막히는 입시 경쟁 속에서 우리들의 질풍노도가 당연했음을, 그들 못지않게 나 역시 철없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더라면 어땠을까. 서로의 성장한 모습을 보며 애정 어린 농담도 하고, 과거의 잘못들을 추억 삼아 함께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시간이 흘러 내가 내민 화해의 손길을 거절하는 그들을 보면서도 난 슬프지 않았다. 아니, 슬펐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큼 내가 관계를, 인연을 가벼이 여겼다는 뜻일 테니까.


엄마한테 꽃 한 송이 선물해주지 않으시던 아버지. 내가 가려던 길에 출입금지 간판을 걸어놓으시고 당신이 걸어오신 길만 따라오라던 아버지. 어릴 적부터 나의 꿈을 존중해주지 않으셨던 아버지. 원망했다, 좀 많이. 오로지 당신만이 정답이라 여기셨기에. 당신 눈에 비친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한낱 풋내기였기에. 뭔가에 홀린 듯 앞만 보고 달리던 아버지는 마치 ‘가족은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그땐 왜 몰랐을까. 아버지가 홀린 게 바로 가족이었다는 것을. 아직은 미완성이었을 가정 속 불안을 한 송이 꽃으로 무마하려는 게 아니라, 언제나 우리에게 ‘가정의 안정’이라는 꽃을 선물하려던 분이셨다는 것을. 당신이 걷던 방황과 고난의 길을 내가 경험하지 않았으면 해서, 나 대신 상처 입어가며 가시밭의 길을 터준 분이셨다는 것을. 하지만 이제 아빠에게 말해주고픈 건, 나도 아빠처럼 내 몸에 상처를 새기고 싶다는 것이다. 그 상처가 날 더 강하게 만들 테니. 내게는 훈장과도 같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지만,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말도 있다. 난 지금까지 내 삶을 비극으로 만드는 모든 것들을 회피해온 것 같다. 고쳐쓸 수 없는 이야기들이라면 지우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어려운 것은 포기하고, 버거운 관계는 거절하고, 상처가 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갔다. 나름대로 버티기 위해. 하지만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더라. 이야기 속에 담긴 생각과 의지는 마음이 되어 내면에 각인되고, 정보가 되어 세상을 거닐더라.


내 앞에 펼쳐진 길들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학이 어렵더라도 조금만 더 견디고 노력했더라면, 내 앞에 펼쳐진 길을 바라보는 것이 조금은 더 기대되고 들떴을 텐데. 널 버거워하던 나의 마음속에도 펄떡이는 모순과 이기심이 있었음을 알았다면, 우리 지금도 같이 놀 수 있었을 텐데. 인생을 조금은 더 놀이터처럼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 가족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을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다면, 함께 더 많은 추억을 엮어올 수 있었을 텐데. 조금만 더 자세히 보았다면 네가 예쁘다는 것을, 삶이 참 예쁘다는 것을 좀 더 일찍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후회도 하고 슬퍼도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나 만회할 기회는 있으니까. 모든 순간들은 반복될 수 있으니까. 보호받는 아이는 언젠가 부모가 되어 자신의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 배우는 학생은 언젠가 선생이 되어, 멘토가 되어, 선배가 되어 누군가를 이끌어줄 수 있다. 우리는 수많은 만남을 거듭하며 서로를 상처 주지 않을 방법을 찾아나갈 것이다. 비극을 반복할수록 우리는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며 숨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 비판 속에 사랑이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을 테니. 그렇게 우리는 고쳐쓸 수 없는 이야기를 고쳐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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