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에셔의 손- 김백상

by 이브와 아담
예비군 동대장과 나, 그의 휴대전화, 학교 앞 풍경, 밤하늘, 소총. 브라운운동처럼 연속되던 불규칙한 충돌이 돌연 내 머릿속에 묻혀 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내 생각이 완벽하게 주체적이고 독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나를 일깨웠다. 뭐랄까. 시커먼 총구에서 튀어나온 가상의 총알이 직경 5.56밀리미터의 구멍을 내며 뇌를 관통한 기분이었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구멍을 메우려는 듯 이미지 하나가 떠올랐다. 에셔의 작품 <그리는 손>이었다. 이 소설은, 거기에서 출발했다.

-작가의 말
모리우스 C. 에셔 <그리는 손>

우리는 스스로가 떠올리는 생각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후손들에 의해 변화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가 창조해낸 모든 것의 영향을 받는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들은 서로 조응하는 관계이다. 조금 더 확장시켜보면, 우리는 우리가 만든 문화와 세상의 영향을 받는다.


소설은 전뇌 공학이 상용화된 미래를 다룬다. 단일적이었던 우리의 생각과 의식은 가지를 뻗어 동시 다발적으로 심층적인 업무들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미래의 우리들은 컴퓨터의 계산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종의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마치 스마트폰을 몸의 일부처럼 지니고 다니는 지금의 우리들처럼. 우리가 낳은 과학 기술은 스스로 성장하여 우리를 뛰어넘기도 하고, 우리 발목을 잡기도 했다. 우리는 기술에 의해 똑똑해진 동시에 멍청해졌다. 기술은 그렇게 우리의 모습을 그려나갔다.


기술은 소설 속 세상을 몇 배로 발전시켜줬지만, 인간성은 퇴보시켰다. 기술의 집합체로 표상되는 한 아이가 있다. 전뇌 공학계의 뛰어난 한 과학자가 인공적으로 만든 딸아이 정마리. 그녀는 여느 초등학생과 다를 바 없는 딸이었지만, 태명이 알파벳과 숫자들의 조합이었던 것에 걸맞게 어딘가 비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타인의 죽음에서 두려움이 아닌 호기심을 느꼈고, 죽음을 그저 평범한 하나의 경험으로 여겼다. 기술이 그려낸 인간, 정마리는 생명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만들어낸 과학 기술은 호기심이라는 안경을 쓰고 인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이보다 실패를 더 잘 묘사해주는 문장이 있을까. 우리는 잃기 전까진 결코 모를 것이다. 아파보기 전까진 결코 모를 것이다. 지금의 행동이, 지금의 선택이 우리를 실패로 이끌 거라는 것을. 당장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고, 스위치의 편리함에 속아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폐허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최고 효율을 위해 앞다투어 만들어내는 기술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정신과 사고를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 과학자도 결코 몰랐을 것이다. 자신의 딸 정마리를 잃기 전까진. 한때 진화된 인류의 상징이었던 정마리는 전뇌 해커가 공모한 테러의 희생양이 되어 목숨을 잃는다.

4세대 전뇌가 그랬듯 <개벽>이 다시 한 번 인간의 정신을 도약시키는 발판이 될 것이다. 진화의 법칙은 언제나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였다. 환경의 작용에 반작용할 힘을 갖추지 못한 생명은 시간의 퇴적층에 묻혔다. 살아남은 생명만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새 시대를 열었다. 인간의 정신이 성장하려면 지금의 정신을 무너뜨려야 한다. <개벽>이 인간의 정신을 붕괴시킬 것이다. 그건 파괴와 재건이라는 두 단계를 포괄한다. 파괴라는 작용이 손을 뻗었을 때 인간의 정신은 어떤 반작용으로 스스로를 재건할 것인가.

-섭리


해커는 정마리의 뇌를 해킹하여 테러의 주모자가 되도록 조종한다. 하지만 해커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한다. 정마리가 담당한 마지막 폭탄은 터지지 말았어야 했다. 완벽한 계획을 위해서, 아직은 터지지 말았어야 했다. 응당 사람이라면, 테러의 희생양이라면 자신 앞에 있던 폭탄 스위치를 누르지 않았을 터.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낄 줄 모르던 정마리는 호기심에 그만 버튼을 눌러버린다. 정마리를 죽인 건 테러범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었다.


소설은 우리에게 경고한다. 기술은 인간의 마음을 묘사할 수 없다. 인간의 마음이 결여된 기술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대로 우리를 파괴시킬 수 있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기계는 인간처럼 생각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그린 기계의 손이 다시 우리의 손을 그린다면, 기계의 손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일이었다.


설령 세상에 우매한 사람들밖에 없더라도 그들을 교화하고 통제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으며, 우리는 불의에 저항하고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소설은 이야기한다. 파멸의 씨앗이 걷잡을 수 없이 자라기 전에, 우리의 자연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기 전에, A.I.의 생존 본능이 우리를 집어삼키기 전에, 누군가의 공약이 공동체를 망치기 전에, 우리가 응당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퇴색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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