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꿈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다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by 이브와 아담

이 이야기는 행복한 꿈을 꾸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서부 개척시대, 경제 부흥기가 불러온 아메리칸 드림 이면에 가려진 미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 제목 후보 중 하나였던 ‘적과 백 그리고 청색 아래에서’를 생각해보면 작가가 1920년대 미국의 본질적인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 이야기는 꿈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 그 결과 꿈 자체까지 그 본질을 잃고 어둡게 뒤틀리는 것에 대한 회한의 자기반성이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비도덕적이다. 톰은 아내 데이지를 두고도 여색에 눈이 먼 바람둥이고 조던은 골프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은밀한 반칙을 저지르며, 소설의 배경인 뉴욕의 사람들은 개츠비가 연 파티에서 개츠비의 음식과 술을 마시며 개츠비를 음해한다. 개츠비 역시 떼돈을 번 신흥 부자이지만 마피아 세력과 손잡고 불법적으로 밀주사업을 벌인 범법자이다. 그럼에도 왜 작가는 개츠비에게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까지 써 가며 개츠비를 옹호하고 있는 것일까? 상류 계급에 속하기 위해 출신과 학벌을 속이고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돈을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성대한 파티에 소비하는 허영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보냈던 개츠비가 뭐가 그렇게 위대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 모든 행동들이 그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가 짝사랑했던 사람, 데이지 뷰캐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타락했다. 하지만 여타 뉴욕 사람들이 꿈을 좇다가 그 욕망에 잠식되어 갈 곳을 잃고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다면 개츠비의 꿈은 그가 죽을 때까지 순수했으며 열정적이었다. 그가 돈을 모아 상류층이라 거짓말을 하고 의미없는 성대한 파티를 매일같이 열며 정작 자신은 먼 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한 이유도 운명처럼 데이지와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상상의 나래를 정확히 청사진으로 그려놓고 오랜 시간에 걸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누군가는 개츠비의 수식어인 ‘위대한’이 그가 정말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가 ‘위대한 바보’이기 때문에 비꼬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해석한다. 하지만 우리가 꾸는 꿈이 한번도 변질되지 않고 오랜 시간동안 순수한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깨끗한 장소도 시간이 지나면 먼지가 쌓이는 것처럼 우리의 꿈에도 불순물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아무리 데이지의 남편인 톰이 그녀를 사랑했었다 한들 그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유혹과 변덕에 빠져 생각을 바꾸기 부지기수다. 하지만 개츠비는 그렇지 않았다. 데이지에게는 톰 보다 개츠비의 사랑이 훨씬 설득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했을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달지 않았다. 데이지는 딸이 있는 가정을 잃지 않기 위해 바람을 피운 톰을 선택했고 억울한 누명을 당해 살해당한 개츠비의 장례식에는 그가 열던 파티에 방문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가고 개츠비가 평생동안 부정했던 그의 아버지만 싸구려 외투를 입은 채 방문했을 뿐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 사람들의 공통된 소망으로 경제적 번영과 자유로운 정치 체계를 기초로 한 가장 이상적인 사회를 이룩하려는 꿈이라고 한다. 유럽의 이민자들은 미국의 무한한 가능성에 큰 꿈을 품고 정착했고 그들은 일정 부분 꿈을 성취했다. 세계 1차대전 이후 활발한 무기산업, 재건사업 등을 통해 경제적 부를 축적한 1920년대의 미국은 풍요로운 시대임과 동시에 그 뒤에 찾아오는 권태로움과 허무주의의 슬픔이 재즈로 나타난 시대였다. 거기에 심한 빈부격차와 금융위기, 이민자와 인종 차별문화 등으로 인해 이미 본래의 의미는 퇴색되고 지금은 미국의 현실을 냉소적으로 풍자할 때나 사용되는 말이 아메리칸 드림이다.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는 퇴색되지 않은 꿈을 영원히 간직했던 제이 개츠비의 낭만을 진정으로 흠모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자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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