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땀 다해 마늘 캐기
“당다라당당 당당당 당다라당당”
새벽 6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핸드폰에 뜬 이름이 엄마인 것을 확인하고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새벽에 무슨 일이지? 아빠에게 무슨 일 있나?’
언제부턴가 때 아닌 부모님의 전화는 나를 긴장하게 했다. 내년이면 팔순인 아빠가 아직도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시는 모습이 내내 마음에 걸려서인 것 같다.
“내가 웬만하면 전화 안 하려고 했는데 오늘 좀 도와줘야겠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주말에 비는 온다고 하고 아직 캐지 않은 마늘에 걱정하고 계셨다. 이미 비가 많이 온지라 이번 비까지 맞으면 다 썩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엄마의 이런 종류의 도움 요청은 늘 거절하기 힘들었다. 쓰러지셨다는 소식이 아니고 아직 건강하셔서 일하시겠다는 소식인 것에 감사하며 가겠다고 했다.
아빠는 평생 공무원으로 근무하시고 퇴직하신 후, 농사를 지으셨다. 아니, 정확히는 퇴직 전에도 늘 농사를 짓고 계셨다. 농사를 짓지만 수익과 연결되는 것은 거의 보지 못했다. 자식들이 알면 달라고 할까 봐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알기로는 그랬다. 수익이 나더라도 다음 해 영농 자금으로 다시 들어가거나 기계가 고장 나면 거기에 돈 대기 바빴다. 인부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사회환원사업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아빠가 고추 농사를 많이 지으면 고추에 병이 돌았고 콩을 많이 심으면 다들 농사가 잘 되어서 가격이 말도 못 하게 내려갔다.
“그렇지, 너네 아빠가 농사를 지었다 하면 그런 일이 생기지.”
외할아버지가 딸을 공무원에게 시집보내며 고생은 안 하고 살겠다 싶어 사위를 마음에 들어 했다고 했다. 엄마는 평생 공무원 마누라만 할 줄 알았는데 농사꾼의 아내로 살게 된 것에 대한 불만을 이렇게 간간히 덧붙였다.
농사를 짓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힘에 부치게 많이 짓는 것이 문제였다. 우리 집 밭, 친척 밭 할 것 없이 놀고 있다는 땅에 많이도 하셨다. 한때는 사 남매와 사위, 며느리, 딸린 아이들까지 다 내려와서 도와드리곤 했는데 그럴수록 다음 해 농사는 더 커져갔다.
“저희는 이제 못 도와드려요. 내년에는 일 좀 줄이세요.”
멀리 사는 자식들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만 올해도 이틀 동안 다 못 캘 마늘을 심어놓으셨다. 한 번씩 일손을 도울 때면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왜 밭일하는 집으로 장가를(시집을)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어.”
“엄마는 왜 농사일하겠다는 남편을 만나서 이 고생을 해.”
아빠가 일을 벌여놓으면 엄마는 같이 수습하느라 늘 애쓰셨다.
일손이 없는 시골에서 두 분이 감당할 수 없는 농사일은 인부를 사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한때는 베트남 인부들이 주로 오셨다. 그들의 손을 빌려 농사짓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면 단체로 안 오기도 하고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도 있었다. 그마저 코로나 이후로 다들 떠나서 한참은 구하기 힘들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일당이 비싸서 잘 부를 수 없었다. 칠 남매인 엄마는 이모들에게 전화를 걸어 총출동시키기도 했다. 이제는 한 분, 두 분 떠나시기도 했고 이모들도 다들 골골대는 형편이라 와달라고 부탁할 수 없었다. 다행히 내가 어릴 때부터 우리 집 일을 도와주시던 아저씨 한 분이 계셨는데 콜라 1.5L를 가방에 싸서 조금씩 홀짝이면서 일을 하셨다. 어딘가 모자랐지만 일은 잘한다고 했다.
오늘도 그 아저씨와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먼저 와서 마늘을 캐고 계셨다. 어른들이 좋아하실까 싶어 임영웅 노래를 멜론에서 찾아 틀고 집 뒤 마늘밭으로 갔다. 임영웅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드넓은 밭에서는 들리지도 않았고 푹푹 찌는 날씨에 핸드폰 온도가 높아져서 그마저도 앱이 멈춰버렸다. 나중에 아빠의 작은 라디오에서 들려온 노래는 그 옛날 관광버스에서나 틀었을 사정없이 꼬부라지는 음악이었다.
누구에게 설명을 듣지 않았지만 브이자 모양을 한 긴 꼬챙이를 챙겨 들고는 거북이 등딱지 같은 엉덩이 방석에 다리를 끼워 넣었다. 마늘을 캐는데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흐르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나마 쑥 빠지고 예쁘게 자란 마늘을 보면 기분이 좋은데 벌써 썩은 내가 나는 마늘을 볼 때면 같이 마음이 무거웠다. 그나마 더 늦지 않게 캐서 다행이다 싶었다. 한참을 캐다 한 고랑을 다 캐고 일어나려는데 무릎이 펴지지 않았다. 슬로비디오 찍듯이 천천히 펴고서야 엉거주춤 일어나 다음 고랑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수박, 아이스크림 새참 챙기랴, 허리에 밴드 둘러매고 점심 식사 챙기랴, 소리 없이 마늘 캐랴 엄마의 굽은 등이 만들어진 그동안의 과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너네 아빠 살아있어서 이렇게 하는 거지.”
암투병을 하시면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으셨던 아빠였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대단한 사람이라며 치켜세웠다. 이 외딴집에 혼자가 아닌 것에 순간순간 눈물을 훔치며 감사했다. 결국 아빠는 흐르는 땀에 병마도 같이 흘려보내셨다. 아빠의 땀이 아빠의 살아있음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오늘 나는 온 땀 다해 응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