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디딜만한 곳
“어머니, 학교 지금 오실 수 있나요?”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학교에서 오는 전화는 나의 모든 세포를 긴장하게 했다. 아이의 사춘기를 겪고 나서는 긴장도가 더 깊어진 것이 사실이다.
‘무슨 일이지?’
학교에서 친구와의 다툼이 있었거나 수업 중 문제가 있었을 때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보통인데 학교에 오라니 ‘이건 무슨 장르야?’
머릿속 회로를 총동원해 봐도 도통 잡히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오만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학기 초에 학부모 연락처 란에 남편 번호를 쓸걸’ 후회하는 생각까지.
상황은 이랬다. 친구의 반지를 장난 삼아 껴봤다가 빠지지 않아서 손가락이 부어오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쌍방 간이 아니라 혼자 겪는 일이라’ 한숨 돌리면서도 이럴 때는 어디를 가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어디 병원에 가야 하죠?” 물었지만 선생님도 떠오르지 않는지 대답이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가면서 해결하자 마음먹고 학교 앞으로 차를 쏘아댔다.
아이를 만나 손가락을 보니 생각보다 심했다. 비누로, 기름으로 다 해봤다는데 어림없게 생겼다. 다른 병원은 다 안 받아준다고 하고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병원을 네비에 치고 달리는데 곧 그 병원에서도 안 받아준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소방관으로 근무하는 지인이 떠올랐다.
“이런 경우에 어디로 가야 하죠?”
119 소방서로 가서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다. 거기에 가면 안전하게 반지를 절단하는 장비가 있다고 했다. 아이는 선생님이 쥐어 주신 얼음찜질을 하면서 손가락을 머리 위로 하고 남은 한 손으로는 여전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이없음과 울화통 사이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 20분 걸려서 도착한 소방서에는 주차할 곳이 없었다. 장애인 주차공간에 겨우 차를 세우고 창문을 열고는
“여기에 세워도 될까요? 아이 손가락이 반지에 껴서요!” 외쳤다.
차량 정비를 하시던 소방관님들은 괜찮으니 주차하고 어서 오라고 하셨다. 바로 긴급 방송이 울려 퍼졌다.
“긴급, 긴급. 손가락 반지 끼임 사고 발생, 손가락 반지 끼임 사고 발생”
순식간에 10명의 소방관이 우르르 들어왔다. 상황을 살펴보고 기계를 가져오고 최종 4명의 소방관이 남았다. 대장님으로 보이시는 분이 지휘를 하시고 한 분은 아이의 손가락을 고정하는 역할, 한 분은 기계로 반지 가는 역할, 마지막 한 분은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을 낮추기 위해 주사기로 물을 뿌리는 역할을 하셨다. 가는 기계가 전혀 위험하지 않다며 자신의 몸에 시범을 보여주기도 하셨다. 아이의 상태를 물어봐주시고 불편함을 없애주려고 고민하셨다.
“은이나 금은 금방 되는데 스탠은 시간이 조금 걸려요. 앉아서 기다리세요.”
지휘관님의 다정한 설명이 있었다. 처음 사고 소식을 접했을 때는 반지값을 물어줘야 하나 걱정하다가 “친구가 이거 싼 거래, 걱정 말래.”하는 소리에 속으로 한시름 놨었다. 그런데 지나치게 싸서 짱짱했다. 반지 한쪽을 가는데 30분이 걸렸다. 손은 이미 주체할 수 없이 부어있어서 비누칠을 해봐도 소용이 없어 반대쪽도 갈아야 했다. 건장한 소방관님들이 철없는 내 아이를 안심시키며 반지를 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황송하고 죄송스러웠다. 그래도 한쪽이 절단되고는 숨통이 조금 트였다. 꼭 반지 속에 갇혀있는 것이 내 아이 손가락이 아니라 내 숨통이었던 듯이.
이제 사무실 안을 돌아볼 여유가 조금 생겼다. 보드 칠판에는 근무 날짜가 적혀 있는 것 같았고 한쪽에는 ‘대비하면 사고 제로, 대충 하면 한 줌 재로’라는 표어가 눈에 들어왔다. 누가 지었는지 라임을 살려서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쪽 벽면에는 소방관의 기도가 쓰여 있었다. “신이시여! 제가 부름을 받을 때에는 아무리 강렬한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 너무 늦기 전에 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 공포에 떨고 있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가냘픈 외침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그들의 고통까지도 나의 품 안에 안을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신의 뜻에 따라 저의 목숨을 잃게 되면 신의 은총으로 아내와 우리 가족을 돌보아 주소서.” 마음이 찡~소리를 내고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여기 소방서에만 걸려있는 글인가 싶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니 ‘소방관의 기도’가 실제로 있었다. 이 기도를 품고 사는 분들이 버티고 있는 한 이 세상은 안전할 것 같았다.
조그만 반지에 내 온 가슴을 졸여댄 1시간이 지났다.
“감사해요. 얼마예요?”
“아니에요. 그냥 가시면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준 이들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간단한 인적사항을 적고 나오면서 아들 등짝을 한 번 내리쳤다.
“이게 뭐냐고.”
“내가 이럴 줄 알았나.”
차 타고 오면서 내내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아들이 뜬금없이
“엄마, 나 소방관 할까 봐. 엄청 멋있었지. 어벤저스인 줄.”
세상의 디딜만한 곳에서 그들의 기도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