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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맛있는독서 Jan 09. 2024

18. 공존과 풍자. 불편하지만 깨달아야 할 이야기

그림작가 권정민의 작품을 읽고


엄마가 태어났습니다.
나와 함께.

-권정민 <엄마도감> 중에서

 

         

 방송작가였던 권정민은 그림책의 매력에 빠져 그림작가가 되었습니다. 멧돼지들의 실용서라 말할 수 있는 대표작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를 2016년 출간하며 인상적인 데뷔를 합니다. 이후,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 <엄마 도감> <사라진 저녁>을 만들었습니다. 권정민 작가는 주인공의 시각에서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들이 얼마나 이상하고 자기중심적인지를 통렬하게 풍자하는 그림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녀가 만든 작품의 주인공들은 생각지도 못한 생태계의 약자(사람 또는 어른과 비교하여)이지만 마치 사람을 관망하는 듯한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엄마도감>을 펼치고 첫 문장이 눈에 꽉 차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엄마가 태어났습니다. 나와 함께.’ 출산 혹은 육아의 경험이 있는 여성이라면 이 문장에서 느껴지는 충격파가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엄마’는 아이와 함께 태어납니다. 아이가 생기면 누구나 엄마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엄마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낯선 삶을 살게 된다는 면에서 아기와 함께 엄마로 태어난다는 말에 격한 공감을 하게 합니다. 책에서 화자는 아기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엄마를 관찰합니다. 이제껏 엄마가 아기를 보살핀다고 생각했지 아기 역시 엄마라는 존재를 살펴볼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어른이고 어른은 인지 활동을 하는 존재이지만 아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서투른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이미 엄마와 아이를 바라보는 관점의 무게가 시소를 타는 어른과 아이의 불균형적인 무게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는 불편합니다. 짙은 초록색에 그려진 총을 어깨에 맨 토끼의 건장한 모습부터 무언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게 하더니 한 장씩 넘길 때마다 헛웃음으로 넘기기에는 마음이 불편합니다. 단어를 설명하는 텍스트는 평범하지만 이미지는 불손합니다. 산책하는 개의 손에 들린 목줄 끝에 사람, 토끼가 엽총으로 잡은 사람...... 그리고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라고 적힌 상자에 담긴 사람의 모습들이 기묘합니다. 인간은 해도 되지만 다른 생명체들은 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코로나라는 세계적 재앙 속에 비대면이 상식이 되면서 가능해질 법한 <사라진 저녁>. 배달의 천국이 되어버린 우리나라의 어느 곳, 일반적인 것 같은 아파트에서 벌어진 상상초월의 문제상황. 밀려드는 주문 때문에 시당은 음식을 만들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고육지책으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으라며 살아있는 돼지를 배달하면서 아파트 주민들은 난처해집니다. 모두 모여 집단지성의 힘으로 문제 해결방법을 찾습니다. 결국 찾은 해결방법은 간단합니다. ‘잡는다’ ‘요리한다’ ‘먹는다’ 아파트 주민들은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는 반려식물이 화자입니다. 살아있는 생물이지만 자발적, 의도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이 사람들을 관찰합니다. 사무실에서 지친 삶에 대해 조금만 더 버텨 보라고 응원하고 요가원에서는 함께 숨을 쉽니다. 식물은 사람들을 지켜보고 무관심 속에 시들어갑니다. 우리는 ‘반려’라는 이름으로 동물 또는 식물의 자연스러움을 지우고 나의 즐거움을 위해 함께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합니다. 진정한 ‘반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에서는 두려움의 존재일 수 있는 멧돼지가 등장합니다. 도로변에서, 가끔은 식당 안으로 돌진해서, 또는 도심 한복판을 길길이 뛰어다니기도 하고 농작물을 모두 헤집어 놓는 바람에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는 존재입니다. 그런 멧돼지가 가족들과 도시로 내려와 매우 지혜롭게(?) 그들의 안락한 새로운 집을 접수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멧돼지가 왜 숲을 나와 사람들의 공간에 뛰어들게 되었을까요? 서식지를 잃은 멧돼지가 사람들의 공간을 점유하는 것만 공포일까요?     



 권정민 작가의 그림책은 가볍고 유쾌하게, 혀를 끌끌 차거나 깔깔거리며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경험이 쌓이고 나뿐 아니라 남, 또는 우리라는 같은 듯 다른, 단순한 듯 복잡한, 감정을 이해 가능할수록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옛말처럼요. 하지만 텍스트와 다른 이질적인 이미지는 읽으며 불편한 독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불편하다는 것은 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무엇인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불편하다면 잠시 책장을 덮고 밀쳐 놓으셔도 괜찮습니다. 권정민 작가의 그림책들은 목소리를 드높여 각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니까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들 모두 느끼고 숨 쉬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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