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요!기 - 대구 번개모임
남자들에게 군대에 대한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를 여자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남자의 인생에서 군대가, 군대생활 중에서 축구가 가장 대중적인 에피소드이기 때문일 것이다. 군대생활 중에 RTC(연대전술훈련), 대대 ATT(대대전술훈련)와 관련된 얘기를 하면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도 부대의 특징에 따라 잘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이유로 군대 이야기의 꽃이 전투체육 시간에 하는 축구 이야기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족을 떠나, 친구를 떠나, 군대에서 완전한 혼자가 되어야 하는 경험은 정말로 강렬하기 때문에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전역을 한 이후에도 전우라는 관계로 인간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경우가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잊히다가 남은 학교생활, 취업, 결혼을 거치면서 서서히 모임의 결속은 약해지고 결국은 추억의 한 장으로 남게 된다.
소대장으로 취임하다
20세기말 세상은 Y2K로 기대와 함께 걱정이 공존하던 그 시절 소대장으로 취임했다. 그때 만난 소대원들과 동거동락하며, 간부에 의한 구타는 거의 사라지고 내무반의 부조리로 구타가 아직 간간히 이루어지는 시기에 2년 동안 소대장을 했다. 그때 만난 소대원들 중 취임 시 상병 이상의 소대원들은 지금 만나지 않는다. 그들도 처음 임관한 소위이자 소대장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소대원 30명 중 다양한 지역에서 모인 소대원들은 같은 소속의 전우라는 이름하여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2번의 GOP투입 근무는 끈끈함을 더 해주기도 했지만, 24시간 밤낮을 가리지 않는 근무로 인해 서로에 대한 불만이 깊어진 시기로도 기억에 남는다. 그 외에 선점중대에서 2회 근무하며 추운 겨울을 나고, 해안검문소에서 지냈던 날들을 포함하면 우리 부대에서도 소대장으로서 가장 힘든 기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 사이 육사, 3사 중대장을 3번 경험하고 다양한 훈련을 하면서 좋던 나쁘던 추억은 하나하나 덧붙여지고 있었다. 2년 동안의 소대장 생활을 끝으로 본부중대장으로 가면서 나의 소대장 생활은 끝이 났다.
전역 후 이어진 만남
전역을 하게 되면 소대장인 나도 마찬가지지만, 소대원들은 남은 학교생활 함께 취업이라는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하는 시기가 온다. 그런 시기에서도 한 두 소대원들에 의해 모임이 만들어지고 연락을 하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참가하게 되었다. 소대원과 소대장의 관계는 어찌 보면 좀 껄끄러울 수 도 있는 관계지만, 서로 얼굴을 붉힐 일도 많이 겪었지만, 서로의 이해로 그것들을 넘어설 수 있었다. 결혼 전에는 간단히 특정지역에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며 군생활을 추억했다. 결혼식에는 다른 지역이었지만 하루 전 날 모여 시간을 보내고 결혼식에 참석하곤 했다. 보통은 결혼을 시작으로 육아에 얽매이다 보면 자연스레 멀어지며 기억 속에만 남는 것으로 정착되는 것이 보통인데, 몇몇 소대원들이 연락이 끊기고 모임에 나오지 않기도 했지만 그사이 결혼과 부모님 상을 거치면서 이런 마음의 빚들이 만남을 계속 이어지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또 다른 원동력은 결혼을 하지 않은 소대원들의 노력이라 할 수 있다. 20명 가까이 만나던 초창기 시절을 거치면서 10명으로 정착이 될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소대원이 3명이 있었고, 그들의 희생과 노력이 모임을 이어오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목포에서 결혼식을 올린 소대원은 결혼식 이후 소식이 끊기기도 하였고, 서해안과 남해안, 동해안으로 가족 동반 여행을 한 일 들과 술 취해 라면 끓이다 발등을 데고, 연어를 한 마리 통째로 가지고 온 소대원이 회에서부터 초밥까지 만들어 파티를 하고, 실로 다양한 모임과 즐거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물론 옛날 얘기하다가 지금 와이프랑 헷갈려 옛 연인을 얘기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북극의 툰드라 마냥 식어버린 기억도 있다. 다행히 잘 극복하여 잘 살고 있지만 말이다. 강원도에서 근무하다 보니, 강원도를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에서 모임을 가졌다. 군대의 추억으로 모인 모임이지만, 본인이 근무했던 지역은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전역초기에 가장 강하게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니 근무했던 지역을 한 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또 가볼 날이 있겠지...
1년 만에 만남
가족 모임으로 이루어지고 꾸준히 회비를 내던 모임의 성격은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산발적 모임으로 변경되었다. 코로나 시기 아직 솔로의 삶을 영위하는 소대원의 집에서 여럿 모인 적도 있고, 가족은 제외하고 소대원들만 모이는 것으로 변화가 시작되었다. 아직 코로나 이후 가족 모임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작년 광주광역시에서 모임 이후 1년 만에 대구지역 소대원들과 모임이 잡혔다. 이제는 만나면 소대원과 소대장과의 관계보다는 친한 형동생처럼 지내고 나이를 먹다 보니 이제 거의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이번 모임은 역시나 솔로인 소대원이 일주일간의 휴가에 맞춰 연락을 했고, 대구에 거주하는 5명이 모두 시간을 맞춰 만나게 되었다. 솔로 1명, 술을 못 마시는 사람 1명, 주 6일 근무 1명, 뭐하는지 모르는 사업하는 사람 1명 등 다양한 캐릭터를 만날 수 있었다. 1년 만의 만남이었지만 어제 본 듯 한 모습으로 즐겁게 술잔을 기울였고, 모두의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N빵으로 계산하기로 하고 결제는 솔로인 소대원이 맡았다. 전과 골뱅이의 선술집을 거쳐 참치집에서 거하게 한 잔 하고 맥주로 모임이 마무리되었다. N빵으로 잘 이어지던 계산은 뭐하는지 모르는 사업하는 소대원이 3차를 계산하고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은 소대원이 4차를 계산하면서 과학적인 N빵은 무너지게 되었다.
다음날 1,2차도 솔로인 소대원이 산다고 하는 바람에 N빵은 완전히 물 건너가고 말았다. 다음 모임에 내 차례가 도래한 순간이었다. 추석을 보내고 1박 2일로 모임을 한 번 갖기로 했다. 가족동반은 자유고 솔로들의 애인동반도 가능한 모임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수도권과 전라도와 경상도에 흩어져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10명의 멤버들이 남은 여름 더위를 잘 견디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에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
PS. 이제 남아 있는 모임은 대학교 동기모임, 선후배 모임, ROTC모임, 소대원 모임, 직장 동기 모임 정도가 전부이다. 자주 만나는 모임도 있고 간간히 만나는 모임도 있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재미있게 살아가는 소대원 모임이 소중하다. 가장 이질적인 모임이고 공간적으로도 가장 넓게 분포하고 있어 좁아지고 있는 사고 체계를 넓혀주는 역할도 하니 말이다.